[동호동락] 신평식 <금호전기 기획조정실 부장> .. '청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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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옛날을 그리워 하게 된다.
특히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순수하게 친구들을 만났던 고등학교시절의
추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혀 지지 않는 법이다.
내게도 그런 면에서 소중한 모임이 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시절의 때묻지 않은 우정을 푸른 바위처럼 유지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청암회"가 그것이다.
"청암회"는 지금으로부터 26년전인 1970년 광주공고 화공과 2학년때
학교내 써클선배들에 의해 이루어진 동기생들의 모임이다.
당시의 모임명칭은 "청암회"가 아닌 "아카시아"라는 이름이었으며
우리는 제9기생들이었다.
"아카시아"는 옛날 어느 고등학교에도 한 두개쯤은 있었던 불량써클과는
전혀 다른 말그대로 건전한 성격의 모임이었다.
모임의 주목적은 친목도모였으며 멤버는 선배들이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도 방정한 소위 모범생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들중에서 선발했다.
물론 학교 선생님들도 우리 모임의 성격과 인원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인문계 학교가 아니어서 당시 우리들의 가장 큰 목표와 관심사는 당연히
취업이었다.
선생님들로부터 취업에 대한 조언도 듣고 우리들끼리도 서로 귀로
주워들은 정보도 교환하면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졸업과 함께 바쁜 세상살이에 쫓기다 보니 자연 만남의 기회도
줄어들게 되었다.
먹고 사는 일이 힘들었는지 "아카시아"는 후배들기수로 내려가면서
점차 모임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어느날 대가 뚝 끊기고 말았다.
"아카시아"에서 "청암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우리들의 모임을 다시
부활시킨 것은 졸업한지 10년이 지나서였다.
어느 정도 사회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옛날의 동기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두명이 서로 연락을 하며 서로의 근황을 묻곤 하다 이러지
말고 다시 뭉치자고 누군가 제안하면서 지금의 "청암회"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땐 광주 한 곳에서 같이 자랐지만 기성인이 된 지금은 서울
부산 이리 광주 여수 등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정례적인 모임은 1년에
한번씩 갖고 있다.
모임은 각자가 사는 곳에서 열기 때문에 해마다 전국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기쁨도 맛보고 있는 셈이다.
정기모임 외에 회원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경조사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꼭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지금 우리멤버는 김도현 (동아타이어이사) 노영석 ((주)합성부장)
박영상 (호남석유화학) 신대윤 (조선대환경공학과교수) 우경현 (전남도청)
장남주 (전남도청) 진준복 (대한생명이리영업소) 등이다.
조금씩 흰머리도 생기면서 주로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도 취업에서
자식자랑 마누라자랑으로 바뀌었지만 우리들이 어릴적 나누었던 순수한
우정만은 언제나 변함없이 간직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5일자).
특히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순수하게 친구들을 만났던 고등학교시절의
추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혀 지지 않는 법이다.
내게도 그런 면에서 소중한 모임이 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시절의 때묻지 않은 우정을 푸른 바위처럼 유지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청암회"가 그것이다.
"청암회"는 지금으로부터 26년전인 1970년 광주공고 화공과 2학년때
학교내 써클선배들에 의해 이루어진 동기생들의 모임이다.
당시의 모임명칭은 "청암회"가 아닌 "아카시아"라는 이름이었으며
우리는 제9기생들이었다.
"아카시아"는 옛날 어느 고등학교에도 한 두개쯤은 있었던 불량써클과는
전혀 다른 말그대로 건전한 성격의 모임이었다.
모임의 주목적은 친목도모였으며 멤버는 선배들이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도 방정한 소위 모범생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들중에서 선발했다.
물론 학교 선생님들도 우리 모임의 성격과 인원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인문계 학교가 아니어서 당시 우리들의 가장 큰 목표와 관심사는 당연히
취업이었다.
선생님들로부터 취업에 대한 조언도 듣고 우리들끼리도 서로 귀로
주워들은 정보도 교환하면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졸업과 함께 바쁜 세상살이에 쫓기다 보니 자연 만남의 기회도
줄어들게 되었다.
먹고 사는 일이 힘들었는지 "아카시아"는 후배들기수로 내려가면서
점차 모임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어느날 대가 뚝 끊기고 말았다.
"아카시아"에서 "청암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우리들의 모임을 다시
부활시킨 것은 졸업한지 10년이 지나서였다.
어느 정도 사회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옛날의 동기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두명이 서로 연락을 하며 서로의 근황을 묻곤 하다 이러지
말고 다시 뭉치자고 누군가 제안하면서 지금의 "청암회"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땐 광주 한 곳에서 같이 자랐지만 기성인이 된 지금은 서울
부산 이리 광주 여수 등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정례적인 모임은 1년에
한번씩 갖고 있다.
모임은 각자가 사는 곳에서 열기 때문에 해마다 전국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기쁨도 맛보고 있는 셈이다.
정기모임 외에 회원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경조사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꼭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지금 우리멤버는 김도현 (동아타이어이사) 노영석 ((주)합성부장)
박영상 (호남석유화학) 신대윤 (조선대환경공학과교수) 우경현 (전남도청)
장남주 (전남도청) 진준복 (대한생명이리영업소) 등이다.
조금씩 흰머리도 생기면서 주로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도 취업에서
자식자랑 마누라자랑으로 바뀌었지만 우리들이 어릴적 나누었던 순수한
우정만은 언제나 변함없이 간직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