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드라마 전개상 취재할 것이 있어서 법원근처에 간적이 있다.

마침 두 전직 대통령의 공판이 있는 날이라 법원앞은 취재차량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길눈 없는 사람이 초행길이라 헤맨 데다 가랑비속에서
옹기종기 대기하고 있는 방송국 사람들의 지친 얼굴이 심사를 우울하게
했다.

그러던중 앞서 걷던 중학생 또래의 두 친구가 주고받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야, 너 전씨나 노씨처럼 살라면 살거냐"

-"물론이지"

-"정말?"

-"그럼, 그만큼 큰돈 챙겼는데 그까짓 몇달 고생이야 양심상 기본이지.
안그래"

-"몇달 고생은? 평생 욕먹고 재산도 다 몰수당하고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데"

-"야. 우리나라 사람 몰라서 그러냐. 보나마나 처음이야 진실을 샅샅이
밝히라느니 뭐니 요란벅적해도 시간 좀 지나면 흐지부지 관심도 없어진다구.
그때되면 슬그머니 꽁꽁 숨겨 놓은 재산으로 다시 잘사는거지 뭐. 두고봐.
내말이 맞을테니"

그 나이 또래의 직선적이고 철없는 얘기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듣는 순간 솔직히 부끄러웠다.

그들의 말이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두 전직 대통령도 방법이야 어쨌든 처음 그자리에 올랐을 때는
잘해보겠다는 소신과 포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들 마음도 어느새 희석된것 또한 사실이다.

새삼 돌이켜보면 사는게 변심의 연속이다.

어렸을때 새학기가 되면 목표를 세우고 새책에 겉옷을 입히면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는가.

앞장 몇 페이지만 꼼꼼히 적어놓은 가계부, 3일쯤 지키다 만 다이어트식단,
새해마다 반복되는 가장의 금연약속, 신혼여행지에서 첫날밤 나누었던
지켜지지 않을 그 수많은 다짐과 약속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더 큰 비극은 우리 스스로 얼마나 변했는지, 처음에 어디서
무엇을 향해 출발했는지를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처음 드라마를 시작할 때의 일이다.

흔히 말하는 "입봉작"을 마치고 두번째 단막극을 썼을 때다.

제목이 "침대"라는 작품으로 덤덤해진 중년부부가 곡절끝에 애정을
회복해 간다는 코믹성 드라마였다.

소재가 현실감이 있어서인지 시청자 반응이 좋았고 전화도 많이 왔었다.

방송 다음날 마침 연출자와 그런 얘기를 하고 있던중 예의 시청자
전화가 걸려왔다.

"꼭 작가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는 말에 전화를 받자 그는
자신을 50대 가장이라고 소개하며 드라마와 똑같이 아내와 애정을
회복하고 싶으니 길을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난 나이도 어렸거니와 미혼이었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그때 느낀 감정은 솔직히 공포였다.

아, 드라마 작가란게 이런거구나, 이렇게 오십이 넘은 남자가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나한테 길을 물을 수 있는거구나, 이렇게 책임감이
무거운거구나, 까딱 잘못 썼다간.

잘 해야지, 정말 좋은 글을 써야지.

그런 야무지고 순수한 다짐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5년.

정말 바쁘게 연속극만 다섯편을 쉬지 않고 썼다.

그중에는 쓰고싶은 이야기도 있었고 방송국측에서 요구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처음 다짐대로 좋은글, 책임있는 글을 썼는가 묻는다면? 어느새
시청자 입맛을 살피고 시청률에 연연하여 좀더 강하고, 좀더 자극적인,
그래서 좀더 장사(?) 될법한 글쟁이가 되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멈춰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리기만 한것 같다.

그게 프로고 그게 상업작가의 한계라면 할 말은 없지만..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