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는 죽었는가.

인플레는 여러나라의 골칫거리임에 틀림없다.

일부국가에서는 아직도 살인적인 인플레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일본 EU등 세계경제의 트로이카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의
물가는 더이상의 골칫거리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매년 조금씩 물가가 오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관리가능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세계는 지난 90년하반기부터 3년여간 지속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물가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 물가는 매우 안정돼 인플레 우려없이 경기부양을 위한
금리인하정책을 실시할수 있었다.

그후 세계경제가 93년무렵부터 미국을 필두로 침체에서 회복하기 시작한
뒤에도 여전히 인플레는 낮았다.

미국의 경우 인플레라는 단어자체가 몇년간 시장에서 사라진듯 했다.

90년대들어 지난해까지 연간 인플레율은 3%를 하회했다.

94년과 95년에는 각각 2.5%안팎에 머물러 60년대초이후 30여년만에
가장 낮은 인플레를 기록하기도 했다.

올들어서도 지금까지 월간 인플레율은 연율로 환산할때 3%를 넘어선 적이
없다.

이처럼 미국의 인플레가 90년대들어 해마다 3%이하의 매우 낮은 수준을
지속하자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인플레는 정말 사망신고를 냈는가"라는
희망섞인 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인플레가 사망진단서에 도장을 찍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관측에는
미국이외의 선진국 상황을 돌아봐도 마찬가지라는 평가가 짙게 깔려 있다.

전통적으로 물가가 안정돼 있는 일본은 최근 몇년간 경기침체로 인플레는
고사하고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까지 나타났다.

95년의 경우 물가는 전년도에 비해 0.3% 하락했고 올해에도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의 물가하락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경기전망보고서를 통해 일본물가가
내년이나 돼야 상승하기 시작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일과 함께 세계 3대경제축인 독일에서도 인플레는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미국보다 낮은 2.2%에 머문 독일의 인플레는 올해에는 더욱 낮아져
1.5%에 그치고 내년에는 1.3%로 더 떨어질 것으로 OECD는 예상하고 있다.

선진국모임인 OECD 27개 회원국전체의 평균인플레도 올해 3.7%, 내년
3.2%로 예상돼 물가에 관한한 세계경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기에다 인플레의 대명사로 통하던 중남미도 90년대들어 물가안정책이
성공, "잃어버린 시대"로 불린 80년대와는 달리 90년대는 중남미에 "다시
찾은 시대"로 표현되고 있을 정도다.

동남아시아국가들도 물가가 무서워 금리를 조정하지 못하겠다는 비명을
지르지는 않고 있다.

세계의 인플레사정이 이쯤되니 국제금융시장에서 "인플레는 죽었는가"라는
말이 나올만도 하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하지만 이 희망섞인 반문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은 매우 조심스럽다.

인플레가 죽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잠자고 있다"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금의 인플레상황을 취침상태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앨런 그린스펀
FRB의장.

그는 최근 의회청문회에 출석, 아직까지는 인플레가 잠자리에 있지만
언제든지 깨어날수 있다고 밝혔다.

때문에 인플레를 막기위해 가까운 시일내에 금리를 올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수 없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하반기중 미국의 인플레가 다소 높아져 3~3.25%에 이른후 내년에는
다시 3%이하로 낮아질 것으로 보고있다.

모건스탠리은행의 수석이코노미스트인 스테펀 로치도 그린스펀의장의
견해에 동조한다.

인플레가 죽었다고 단정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으며 잠들어 있는 인플레가
언제라도 기지개를 켤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당국은 인플레 예방차원에서 금리를 소폭 인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인플레가 죽지 않고 잠들어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은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인하를 검토중이다.

반면에 일본은 금리인상을 고려하고 있다.

물가가 불안해서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낮아진 금리를 조정해야 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결국 미.일.독은 인플레에 관한한 손을 놓고 거의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플레는 죽었는가"라는 금융시장의 의문에 대해 이들 3국은
죽지는 않았지만 잠들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분명 어느 국가든 물가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큰 짐을 더는 것이
되고 이같은 여건하에서 보다 나은 경제를 꾸려가기가 쉬워지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잠자고 있는 인플레가 언제 세계를 다시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
넣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이정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