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풀어진 펄프같이 뭉클하고 축축한 질감의 슬픔이나 후회 같은
것들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그 흐물흐물하고 가벼운 것들의 어디에 날이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그것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득 날카로운 날을 만들어 세우고
음모처럼 속살을 파고드는 순간의,..

오, 어느 날 갑자기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물 속에 차악 갈앉아 있는
우울함이나 그리움의 음험하고 습기 찬 덩어리를 베어나가는, 내 마음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에게 살을 베인다.

< 시집 "마음에 살을 베이다"에서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