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13) 정찬대 <파나마/서울 KMC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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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의 나라 파나마.
남미와 북미,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이 작은 나라에는 이곳을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남미 시장을 공략하는 교두보로 만들어 보겠다는 큰 꿈을 키워
가는 한 한국인이 살고 있다.
파나마에 한국상품 전시판매장(KMC)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정찬대사장
(40)이 바로 그다.
정사장이 파나마에 첫발을 디딘것은 지난 86년 2월.
가진 것이라곤 여행가방 하나와 5,000달러가 전부였다.
국립 목포해양대를 졸업하고 율산실업 범양 삼미사 해외사업부 등에서
외항선을 5년 가까이 타면서 그야말로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돌아다녔다.
혈기 넘치는 20대 후반의 그가 해외 진출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커다란 배에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을 하나 가득 싣고 세계의 시장에
내다 파는 수출역군이 되어 보리라"는 꿈이었다.
얼마뒤 그는 외항선 타기를 그만뒀다.
그후 얼마간 참으로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해운항만청 선원 선박국에서 공무원으로 1년여동안 근무하기도 했지만 그의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세상 좁다며 돌아다녔던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해운항만청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정착지를 물색
하기 위한 여행길에 나섰다.
유럽각국과 미국을 둘러 보았지만 썩 자신이 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당시 유행하던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지로 이민을 하자니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날 그는 국립도서관에 나가 해외 각국에 대한 소개책자를 훑어보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을 발견했다.
"파나마에서는 영어가 통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외항선원시절 몇번인가 파나마운하를 통과해본 적도 있고 해서
"해운의 중계기지" 파나마가 초기 정착지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했지요"
파나마 정착후 맨 처음 시작한 사업은 선용품공급업.
업종 특성상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24시간 회사문을 열어야
했다.
온 가족이 교대로 동원돼 일을 한 것이다.
파나마운하에서는 매일같이 깊은 밤과 꼭두새벽에도 배들이 운하를 통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서너시간 이상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억척스러움이 그의 선박관련업무 종사경험이나 옛 지인들의 도움
등과 어우러져 기대보다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업무 영역도 선용품공급에서 선박대리점업으로까지 넓혀갔다.
2년뒤인 88년 얼마간 모은 자본으로 정씨는 350t급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인수, "하나로 어업"사를 설립하고 원양어업에 뛰어들었다.
업계에서는 이런 배를 참치독항선이라 하는데 선단을 구성하지 않고 배
한척으로 조업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23명이 승선한 이 참치잡이배는 페루어장을 중심으로 태평양에서 조업
했지만 별 신통한 재미를 보지 못해 90년 처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수산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93년 다시 참치독항선을
구입, 대서양쪽에서 조업을 했다.
아프리카 시에라레온 근해상에서 하루 1t 정도의 안정된 조업을 할 수
있었고 잡은 고기들은 전량 일본에 수출했다.
하나로어업사의 안정적인 운영에 힘입어 정사장은 이번엔 무역업으로
진출했다.
93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해외영업활동
을 보다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이른바 KMC 설립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KMC란 Korean Merchandising Center의 약자로 "한국상품 상설 전시판매장"
을 뜻한다.
해외 현지에 상설 전시판매장을 설치하고 여기에 해외 지사가 없는 우리
중소기업들의 제품을 진열 판매한다는 구상이었다.
KOTRA는 몇몇거점을 선정하고 현지교포를 대상으로 사업자선정에 나섰으나
파나마에서는 정책성 사업에 대한 생소함과 성공가능성에 대한 불안감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희망자가 없었다.
정사장은 이때 파나마의 KMC 사업을 맡겠다고 나섰다.
물론 그는 선박대리점업 및 수산업으로 어느 정도 현지 기반을 구축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는 무역업에 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문외한
이나 마찬가지였다.
KOTRA로서는 중남미 중계무역지로서 파나마의 중요성에 비추어 파나마에
KMC가 설치돼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결국 사업 희망자인 정사장을
적격자로 선정했다.
모든 사업의 초기단계가 그렇듯이 파나마 KMC사업도 초기 단계에서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계속해서 자금만 투입됐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이미 각오한 바였기 때문에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사업확장에 나섰다.
94년엔 설립자본의 상당부분을 출자해서 서울KMC를 설립했다.
이곳의 역할은 전세계 KMC의 한국상품 구매센터라 할 수 있다.
즉 각 KMC의 요청에 따라 우리 중소기업 제품들을 집하 조달해 주는 것을
주기능으로 하여 각 KMC와 우리 국내업체와의 협력채널을 구축해 안정적인
물품공급라인을 확보하는 등 종합적인 지원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파나마KMC는 아직까지도 흑자를 내지는 못하고 있으나 멀지않아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방화시대를 맞아 파나마KMC는 서울시를 비롯한 8개 지방정부와
업무협정을 체결하고 이들 지방정부가 선정한 집중 육성업체들의 중남미시장
개척업무를 대행하는 등 우리나라 지방 중소기업의 세계화에도 크게 기여
하고 있다.
그는 우리 기업체들이 중남미시장을 공략할 때 염두해야 할 몇가지 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현지 진출시 현지의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사고나 행동방식은 일단 접어 두고 현지 것에 융화되려는 자세를
가져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현지화가 가능하다는 것.
즉 현지진출은 정복이나 지배의 시각이 아닌 융화와 공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기존의 사업영역이나 상품시장을 빼앗겠다는 사고보다는 아직 현지에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사업이나 상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것과 상호 보완을 통한 공존공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또 현지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현지인들이 이미 구축해 놓은
기존 유통망과 마찰을 일으켜 가면서 현지 도.소매상의 사업영역을 잠식해
가는 형태의 진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구축된 도.소매상에 물품을 대주는 형태의 상호공존 방식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중남미투자의 기본 시각이 보다 성숙돼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제까지 중남미에 대한 현지투자진출은 투자대상지가 몇몇 국가로 한정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품목도 봉제를 중심으로한 극히 일부 품목에 제한돼
있었다.
저임금을 쫓아서 미국이라는 시장을 염두에 둔 우회기지로서의 투자대상지
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저임금은 필연코 시간이 감에따라 메리트를 잃어갈 것이고 미국이
비록 큰 시장이기는 하지만 점차 중남미산 제품에 대한 쿼터적용 등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를 감안하면 우회투자가 아니라 바로 그 현지시장을 목표로
하는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남미공동시장에 대한 현지 생산진출은 바로 그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제품을 대상으로 그 시장에 맞는 적정규모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파나마의 경우 시장 크기도 작고 인건비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물류유통 중심지로서의 비교우위성을 최대로 활용한다면 훌륭한
투자진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농기계 조립생산공장 등이 진출한다면 적격
이겠지요"
정사장은 오늘도 파나마에 우리 중소기업들의 중남미시장 진출을 위한
물류유통 중심기지를 설립, 중남미 구석구석까지 한국 상품을 공급하겠다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밤깊어가는 줄 모르고 사무실 불을 밝혀놓고 있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0일자).
남미와 북미,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이 작은 나라에는 이곳을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남미 시장을 공략하는 교두보로 만들어 보겠다는 큰 꿈을 키워
가는 한 한국인이 살고 있다.
파나마에 한국상품 전시판매장(KMC)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정찬대사장
(40)이 바로 그다.
정사장이 파나마에 첫발을 디딘것은 지난 86년 2월.
가진 것이라곤 여행가방 하나와 5,000달러가 전부였다.
국립 목포해양대를 졸업하고 율산실업 범양 삼미사 해외사업부 등에서
외항선을 5년 가까이 타면서 그야말로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돌아다녔다.
혈기 넘치는 20대 후반의 그가 해외 진출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커다란 배에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을 하나 가득 싣고 세계의 시장에
내다 파는 수출역군이 되어 보리라"는 꿈이었다.
얼마뒤 그는 외항선 타기를 그만뒀다.
그후 얼마간 참으로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해운항만청 선원 선박국에서 공무원으로 1년여동안 근무하기도 했지만 그의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세상 좁다며 돌아다녔던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해운항만청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정착지를 물색
하기 위한 여행길에 나섰다.
유럽각국과 미국을 둘러 보았지만 썩 자신이 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당시 유행하던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지로 이민을 하자니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날 그는 국립도서관에 나가 해외 각국에 대한 소개책자를 훑어보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을 발견했다.
"파나마에서는 영어가 통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외항선원시절 몇번인가 파나마운하를 통과해본 적도 있고 해서
"해운의 중계기지" 파나마가 초기 정착지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했지요"
파나마 정착후 맨 처음 시작한 사업은 선용품공급업.
업종 특성상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24시간 회사문을 열어야
했다.
온 가족이 교대로 동원돼 일을 한 것이다.
파나마운하에서는 매일같이 깊은 밤과 꼭두새벽에도 배들이 운하를 통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서너시간 이상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억척스러움이 그의 선박관련업무 종사경험이나 옛 지인들의 도움
등과 어우러져 기대보다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업무 영역도 선용품공급에서 선박대리점업으로까지 넓혀갔다.
2년뒤인 88년 얼마간 모은 자본으로 정씨는 350t급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인수, "하나로 어업"사를 설립하고 원양어업에 뛰어들었다.
업계에서는 이런 배를 참치독항선이라 하는데 선단을 구성하지 않고 배
한척으로 조업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23명이 승선한 이 참치잡이배는 페루어장을 중심으로 태평양에서 조업
했지만 별 신통한 재미를 보지 못해 90년 처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수산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93년 다시 참치독항선을
구입, 대서양쪽에서 조업을 했다.
아프리카 시에라레온 근해상에서 하루 1t 정도의 안정된 조업을 할 수
있었고 잡은 고기들은 전량 일본에 수출했다.
하나로어업사의 안정적인 운영에 힘입어 정사장은 이번엔 무역업으로
진출했다.
93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해외영업활동
을 보다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이른바 KMC 설립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KMC란 Korean Merchandising Center의 약자로 "한국상품 상설 전시판매장"
을 뜻한다.
해외 현지에 상설 전시판매장을 설치하고 여기에 해외 지사가 없는 우리
중소기업들의 제품을 진열 판매한다는 구상이었다.
KOTRA는 몇몇거점을 선정하고 현지교포를 대상으로 사업자선정에 나섰으나
파나마에서는 정책성 사업에 대한 생소함과 성공가능성에 대한 불안감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희망자가 없었다.
정사장은 이때 파나마의 KMC 사업을 맡겠다고 나섰다.
물론 그는 선박대리점업 및 수산업으로 어느 정도 현지 기반을 구축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는 무역업에 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문외한
이나 마찬가지였다.
KOTRA로서는 중남미 중계무역지로서 파나마의 중요성에 비추어 파나마에
KMC가 설치돼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결국 사업 희망자인 정사장을
적격자로 선정했다.
모든 사업의 초기단계가 그렇듯이 파나마 KMC사업도 초기 단계에서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계속해서 자금만 투입됐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이미 각오한 바였기 때문에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사업확장에 나섰다.
94년엔 설립자본의 상당부분을 출자해서 서울KMC를 설립했다.
이곳의 역할은 전세계 KMC의 한국상품 구매센터라 할 수 있다.
즉 각 KMC의 요청에 따라 우리 중소기업 제품들을 집하 조달해 주는 것을
주기능으로 하여 각 KMC와 우리 국내업체와의 협력채널을 구축해 안정적인
물품공급라인을 확보하는 등 종합적인 지원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파나마KMC는 아직까지도 흑자를 내지는 못하고 있으나 멀지않아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방화시대를 맞아 파나마KMC는 서울시를 비롯한 8개 지방정부와
업무협정을 체결하고 이들 지방정부가 선정한 집중 육성업체들의 중남미시장
개척업무를 대행하는 등 우리나라 지방 중소기업의 세계화에도 크게 기여
하고 있다.
그는 우리 기업체들이 중남미시장을 공략할 때 염두해야 할 몇가지 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현지 진출시 현지의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사고나 행동방식은 일단 접어 두고 현지 것에 융화되려는 자세를
가져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현지화가 가능하다는 것.
즉 현지진출은 정복이나 지배의 시각이 아닌 융화와 공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기존의 사업영역이나 상품시장을 빼앗겠다는 사고보다는 아직 현지에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사업이나 상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것과 상호 보완을 통한 공존공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또 현지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현지인들이 이미 구축해 놓은
기존 유통망과 마찰을 일으켜 가면서 현지 도.소매상의 사업영역을 잠식해
가는 형태의 진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구축된 도.소매상에 물품을 대주는 형태의 상호공존 방식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중남미투자의 기본 시각이 보다 성숙돼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제까지 중남미에 대한 현지투자진출은 투자대상지가 몇몇 국가로 한정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품목도 봉제를 중심으로한 극히 일부 품목에 제한돼
있었다.
저임금을 쫓아서 미국이라는 시장을 염두에 둔 우회기지로서의 투자대상지
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저임금은 필연코 시간이 감에따라 메리트를 잃어갈 것이고 미국이
비록 큰 시장이기는 하지만 점차 중남미산 제품에 대한 쿼터적용 등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를 감안하면 우회투자가 아니라 바로 그 현지시장을 목표로
하는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남미공동시장에 대한 현지 생산진출은 바로 그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제품을 대상으로 그 시장에 맞는 적정규모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파나마의 경우 시장 크기도 작고 인건비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물류유통 중심지로서의 비교우위성을 최대로 활용한다면 훌륭한
투자진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농기계 조립생산공장 등이 진출한다면 적격
이겠지요"
정사장은 오늘도 파나마에 우리 중소기업들의 중남미시장 진출을 위한
물류유통 중심기지를 설립, 중남미 구석구석까지 한국 상품을 공급하겠다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밤깊어가는 줄 모르고 사무실 불을 밝혀놓고 있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