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일본총리의 야스쿠니신사 공식참배가 또다시 큰 파문을 몰고
왔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등 A급 전법자 10명의 위패가 있는 신사를
총리의 신분으로 참배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패권주의, 대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조짐이 아니냐 하는 우려때문이다.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 이후의 순국자와 전몰자 250만여명의
위패를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869년(메이지2년) 도조의 구단사가에 초혼사를 창건하여 79년
야스쿠니로 이들을 바꾸어 관립신사가 되었다가 2차대전뒤 종교법인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한 야스쿠니신사를 또다시 관립으로 복귀시키고 총리와 각료의
참배를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져 왔다.

1969년 자민당은 야스쿠니신사의 종교성을 배제하여 총리 관할기관으로
하고 그 의식행사와 업무추진에 필요한 경비의 일부를 국비로 부담하는
취지의 법안을 내놓아 일본인들의 검은 저의를 드러내게 된다.

그 법안은 일본헌법 제20조(정교의 분리)와 제89조(종교단체에 대한
공급지출의 금지)의 규정에 위배된다는 반대론과 국민감정을 앞세운
찬성론이 정계와 종교계에서 격렬하게 맞선 가운데 74년 중의원에서 강행
채택되었으나 참의원에서 폐지되고 말았다.

자민당은 법안이 폐기되자 공식참배 실현으로 전술을 바꿨다.

이는 75년8월15일 미키 총리의 참배로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사적인
참배"라고 했지만 점차 공식참배로 옮겨 갔다.

78년의 후쿠다 총리, 85년의 나카소네 총리와 각료 등의 공식참배가
잇따라 이루어져 내외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85년에는 오사카와 교토의 시민 6명이 나카소네의 공식참배가 헌법의
정교분리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을 들어 국가와 나카소네를 상대로
600만엔의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오사카 지법과 고법은 각기 89년과 92년에 다같이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으나 고법은 판결문에서 "공비에서 3만엔을 지출한 이 공식참배는
헌법20조, 89조에 위반한 혐의가 짙다"고 적시해 주목을 끌었다.

반면 센다이고법은 91년 이와데 야스쿠니소송에서 공식참배가
헌법의 정교분리원칙에 저촉된다는 판결을 내려 그 위법성을 명확히
했다.

일본에서조차 저항을 받아온 야스쿠니신사 공식참배를 강행해온
정치인들의 속셈은 너무나 확연한 것이 아닐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