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협회 창립 50돌] "격동의 반세기"..공로/앞으로의 과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연간 4백만달러에서 시간당 3천만달러로"
4백만달러는 반세기전인 46년의 수출실적이고 3천만달러는 작년의 시간당
평균 수출물량이다.
한국의 수출산업이 얼마나 숨가뿐 질주를 해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계산해
본 수치다.
그러나 이 수치도 그저 숫자놀음일뿐 그 질주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쏟아졌는지를 말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을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땀과 눈물의 주인공들인 수출전사들
뿐이다.
더 있다면 그들의 곁에서 함께 뛰며 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지켜봐온
한국무역협회뿐일 것이다.
그 무역협회가 오늘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한국무역의 역동적인 반세기 역사는 무역협회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협회가 설립된 46년은 세계적으로는 자유무역의 태동기이자 국내적으로는
한국무역의 발아기였다.
전후 경제질서로 작용할 브레튼 우즈체제가 이때 막 출범했고 비록 정크선
으로 실어나르는 초라한 형태로나마 "메이드 인 코리아"가 바깥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 시기에 무역협회는 근대적 무역질서를 정립하고 무역통신을 간행하는
등 수출한국의 터닦기에 진력했다.
60년대 들어 정부가 경제개발에 시동을 걸면서 무역협회는 수출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맡게 된다.
일본에 이어 뉴욕 함부르크 홍콩에 해외지부가 설치됐고 중소기업의 수출을
대행할 상사로 고려무역이 설립됐다.
수출진흥특별회계의 재원인 수입부담금이 징수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무엇보다도 64년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하면서 국민들에게 "수출입국"의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이 시대의 가장 큰 정신적 유산이다.
70년대는 수출드라이브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무역인과 무역협회였다.
석유 한 방울 안나는 한국이 1,2차 오일 쇼크를 견뎌낸 것도 "수출전사"
들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77년에는 수출 1백억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1억달러 능선을 넘은지 불과 13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무협의 활동도 이 시기에 와서 비로서 한국의 무역을 대표하는 단체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역전산통계 업무가 개시됐고 수출촉진단이 파견됐다.
또 세계무역센터협회(WTCA)에 가입한 것을 비롯, 한미경제협의회 등 외국의
민간경제단체들과 잇따라 협의체도 구성했다.
그중에도 가장 큰 성과는 KOEX(한국종합전시장)를 개관, 국제적 규모의
전시장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0.26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맞이한 80년대는 무역업계로서도 힘든
시기였다.
일본의 과도한 무역흑자와 미국의 쌍동이 적자는 전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신보호무역주의를 대두시켰다.
GATT체제를 대체할 UR협상이 본격화된 것도 이 때부터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국은 G7의 플라자합의 이후 찾아온 3저호황을 타고
사상처음 무역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한편 이같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 무협의 활동도 종래의 수출진흥 위주에서
80년대부터는 통상협력 쪽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협회내에 국제통상부가 신설됐고 세계의 통상협상무대인 워싱턴과 브뤼셀에
사무소가 설치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무역회관을 준공,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는 종합
무역센터를 마련했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90년대의 키워드는 세계화 정보화이고 이는 무역업계도
마찬가지다.
WTO(세계무역기구)출범이 의미하는 무한경쟁시대의 생존전략은 세계화와
정보화에 있다.
무협이 국제무역연수원을 개관, 무역인력 양성에 나서고 한국무역정보통신
(KTNet)을 설립한 것도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응하기 위해서다.
무역협회는 이렇게 창립 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그때 그때 시대상황에 따라
한국의 "수출군단"을 이끌며 마침내 작년에는 대망의 수출 1천억달러 고지에
올라섰다.
그리고 오늘 맞이한 무협의 창립 50돌.
무역업계로서는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무협의 50돌 잔치가 마냥 감격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선 무협 자체가 새로운 재원확보라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 무협의 주요 운영재원이었던 무역진흥기금이 당장 오는 98년이면
폐지되기 때문이다.
무협은 이에 대비해 인터컨티넨탈호텔 등 협회자산 매각 등을 통해
3천억원의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새로운 수익사업을 개발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무협의 자산매각은 최근의 부동산경기 침체로 인해 생각처럼 수월
하지 않을 전망이고 새로운 수익사업이라는 것도 아직 이렇다할 만한
"꺼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재정문제와 함께 올들어서의 심각한 수출부진도 무협의 50주년
생일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수출 1천억달러 달성에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였던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그랬나 싶을 만큼 수출전선에는 찬바람만 일고 있다.
수출부진 요인이래야 지극히 단순하다.
간판상품인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등 몇몇 제품의 국제가격 하락과 엔화
약세가 전부다.
그런데도 국내 수출업계는 이 단순한 요인들을 극복할 힘이 현재로서는
없다.
수출산업이 일부품목에 지나치게 편중돼 성장해 왔고 독자적인 기술 및
품질경쟁력 대신 가격경쟁력에만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한국의 수출산업은 성장잠재력이 크다는 사실이다.
국민 1인당 수출액만 봐도 그렇다.
현재 한국의 1인당 수출액은 2천8백80달러로 일본의 3천2백달러 대만의
4천5백달러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는 역으로 한국의 수출능력은 노력만하면 더 개발될 여지가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문제는 이런 기대와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다.
우선 기업들은 과거처럼 저가에 의한 물량확대로 승부를 걸겠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대신 신상품개발과 품질고급화로 수출상품의 고부가가치화를 서둘러야
한다.
이와함께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가격파괴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아웃소싱
역외가공 공정분업 등 "세계화 경영능력"을 배양해야 할 때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도 변해야 한다.
아직도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는 행정규제를 보다 과감히 풀어 기업들이
마음껏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일이 급선무다.
또 경쟁력강화의 족쇄가 되고 있는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의 정비도
시급하다.
여기에 요즘 미국의 CIA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범정부적으로 기업들의
수출활동 지원에 나선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업계와 정부의 중간에서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야 말로 무협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역할일 것이다.
<임혁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1일자).
4백만달러는 반세기전인 46년의 수출실적이고 3천만달러는 작년의 시간당
평균 수출물량이다.
한국의 수출산업이 얼마나 숨가뿐 질주를 해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계산해
본 수치다.
그러나 이 수치도 그저 숫자놀음일뿐 그 질주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쏟아졌는지를 말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을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땀과 눈물의 주인공들인 수출전사들
뿐이다.
더 있다면 그들의 곁에서 함께 뛰며 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지켜봐온
한국무역협회뿐일 것이다.
그 무역협회가 오늘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한국무역의 역동적인 반세기 역사는 무역협회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협회가 설립된 46년은 세계적으로는 자유무역의 태동기이자 국내적으로는
한국무역의 발아기였다.
전후 경제질서로 작용할 브레튼 우즈체제가 이때 막 출범했고 비록 정크선
으로 실어나르는 초라한 형태로나마 "메이드 인 코리아"가 바깥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 시기에 무역협회는 근대적 무역질서를 정립하고 무역통신을 간행하는
등 수출한국의 터닦기에 진력했다.
60년대 들어 정부가 경제개발에 시동을 걸면서 무역협회는 수출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맡게 된다.
일본에 이어 뉴욕 함부르크 홍콩에 해외지부가 설치됐고 중소기업의 수출을
대행할 상사로 고려무역이 설립됐다.
수출진흥특별회계의 재원인 수입부담금이 징수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무엇보다도 64년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하면서 국민들에게 "수출입국"의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이 시대의 가장 큰 정신적 유산이다.
70년대는 수출드라이브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무역인과 무역협회였다.
석유 한 방울 안나는 한국이 1,2차 오일 쇼크를 견뎌낸 것도 "수출전사"
들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77년에는 수출 1백억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1억달러 능선을 넘은지 불과 13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무협의 활동도 이 시기에 와서 비로서 한국의 무역을 대표하는 단체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역전산통계 업무가 개시됐고 수출촉진단이 파견됐다.
또 세계무역센터협회(WTCA)에 가입한 것을 비롯, 한미경제협의회 등 외국의
민간경제단체들과 잇따라 협의체도 구성했다.
그중에도 가장 큰 성과는 KOEX(한국종합전시장)를 개관, 국제적 규모의
전시장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0.26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맞이한 80년대는 무역업계로서도 힘든
시기였다.
일본의 과도한 무역흑자와 미국의 쌍동이 적자는 전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신보호무역주의를 대두시켰다.
GATT체제를 대체할 UR협상이 본격화된 것도 이 때부터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국은 G7의 플라자합의 이후 찾아온 3저호황을 타고
사상처음 무역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한편 이같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 무협의 활동도 종래의 수출진흥 위주에서
80년대부터는 통상협력 쪽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협회내에 국제통상부가 신설됐고 세계의 통상협상무대인 워싱턴과 브뤼셀에
사무소가 설치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무역회관을 준공,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는 종합
무역센터를 마련했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90년대의 키워드는 세계화 정보화이고 이는 무역업계도
마찬가지다.
WTO(세계무역기구)출범이 의미하는 무한경쟁시대의 생존전략은 세계화와
정보화에 있다.
무협이 국제무역연수원을 개관, 무역인력 양성에 나서고 한국무역정보통신
(KTNet)을 설립한 것도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응하기 위해서다.
무역협회는 이렇게 창립 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그때 그때 시대상황에 따라
한국의 "수출군단"을 이끌며 마침내 작년에는 대망의 수출 1천억달러 고지에
올라섰다.
그리고 오늘 맞이한 무협의 창립 50돌.
무역업계로서는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무협의 50돌 잔치가 마냥 감격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선 무협 자체가 새로운 재원확보라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 무협의 주요 운영재원이었던 무역진흥기금이 당장 오는 98년이면
폐지되기 때문이다.
무협은 이에 대비해 인터컨티넨탈호텔 등 협회자산 매각 등을 통해
3천억원의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새로운 수익사업을 개발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무협의 자산매각은 최근의 부동산경기 침체로 인해 생각처럼 수월
하지 않을 전망이고 새로운 수익사업이라는 것도 아직 이렇다할 만한
"꺼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재정문제와 함께 올들어서의 심각한 수출부진도 무협의 50주년
생일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수출 1천억달러 달성에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였던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그랬나 싶을 만큼 수출전선에는 찬바람만 일고 있다.
수출부진 요인이래야 지극히 단순하다.
간판상품인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등 몇몇 제품의 국제가격 하락과 엔화
약세가 전부다.
그런데도 국내 수출업계는 이 단순한 요인들을 극복할 힘이 현재로서는
없다.
수출산업이 일부품목에 지나치게 편중돼 성장해 왔고 독자적인 기술 및
품질경쟁력 대신 가격경쟁력에만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한국의 수출산업은 성장잠재력이 크다는 사실이다.
국민 1인당 수출액만 봐도 그렇다.
현재 한국의 1인당 수출액은 2천8백80달러로 일본의 3천2백달러 대만의
4천5백달러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는 역으로 한국의 수출능력은 노력만하면 더 개발될 여지가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문제는 이런 기대와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다.
우선 기업들은 과거처럼 저가에 의한 물량확대로 승부를 걸겠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대신 신상품개발과 품질고급화로 수출상품의 고부가가치화를 서둘러야
한다.
이와함께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가격파괴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아웃소싱
역외가공 공정분업 등 "세계화 경영능력"을 배양해야 할 때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도 변해야 한다.
아직도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는 행정규제를 보다 과감히 풀어 기업들이
마음껏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일이 급선무다.
또 경쟁력강화의 족쇄가 되고 있는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의 정비도
시급하다.
여기에 요즘 미국의 CIA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범정부적으로 기업들의
수출활동 지원에 나선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업계와 정부의 중간에서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야 말로 무협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역할일 것이다.
<임혁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