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피서와 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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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창 대자리에/적삼바람 누웠다가, /꾀꼬리 두어소리/꿈길이
동강났네.
/짙은 잎에 가린 꽃/철지나 피어 있고, /엷은 구름 새는 햇살/비 오면서
환하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가 어느해 한여름 산속 피서지에서 읊은 "하일"이란
시다.
선잠에서 깨어나 눈에 비치는 대로 묘사한 바깥풍경은 한없이 한가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때늦게 피어난 봄꽃이나 꿀맛같은 낮잠을 깨운 꾀꼬리소리, 그리고
멀쩡한 날에 오락가락하는 가랑비는 이곳이 속세와는 격리된 깊은
산중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발 그림자 깊숙이/옮겨가 있고/연꽃 향기 연신 풍겨 오는데, /꿈에서
휘돌아 온/높은 베개 위/오동잎엔 빗소리 요란도 하이" 조선의 대표적
시인 서거정도 "수기"란 시에서 낮잠을 즐기며 한더위를 피해 지내던
시골의 한정을 이렇게 읊었다.
옛 시인들은 이처럼 삼복더위를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숨어들어 여유를
즐겨가며 살았다.
그들이 "피서"란 말대신 "은서"라는 말을 즐겨 썼던 까닭도 잠시나마
시끄럽고 번잡한 사회를 떠나 한적한 자연속에서 은자처럼 세태인정을
관조하며 심신을 수양하는데 뜻을 둔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은서"란 양반관료등 일부 지식계층의 "수양"이었지 일반
서민들도 즐길 수 있는 "놀이"는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자나무그늘 밑에 평상을 내다놓고 더위를 식히며
부채질을 하거나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이 일급 피서였던
셈이다.
잘 때는 죽침을 베고 죽부인을 안고 잤다.
외출할 때는 등나무로 만든 등걸이와 등토시위에 풀먹인 모시옷이나
삼베옷을 입고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삿갓을 썼다.
음식에도 신경을 써 개장국 육개장 계삼탕 팥죽등을 복날 별식으로
삼아 이열치열로 몸을 보하려했다.
본격적 휴가철을 맞아 국내외 피서지로 향하는 인파가 들끓고 있다.
고속도로는 줄을 이은 차량행렬로 거북이걸음이고 공항도 연일 만원이다.
더위를 못참아서라기 보다 더위를 즐기기 위해 고생길도 감수하겠다는
생각보다 더 역설적인게 또 있을까.
국내외 피서지는 이미 조용하고 한적해 몸과 마음을 쉬게 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수양"이 아니라 "놀이"가 돼버린 피서객들의 행태를 보면서 피서다운
피서를 하려면 상급풍류인 "은서"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5일자).
동강났네.
/짙은 잎에 가린 꽃/철지나 피어 있고, /엷은 구름 새는 햇살/비 오면서
환하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가 어느해 한여름 산속 피서지에서 읊은 "하일"이란
시다.
선잠에서 깨어나 눈에 비치는 대로 묘사한 바깥풍경은 한없이 한가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때늦게 피어난 봄꽃이나 꿀맛같은 낮잠을 깨운 꾀꼬리소리, 그리고
멀쩡한 날에 오락가락하는 가랑비는 이곳이 속세와는 격리된 깊은
산중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발 그림자 깊숙이/옮겨가 있고/연꽃 향기 연신 풍겨 오는데, /꿈에서
휘돌아 온/높은 베개 위/오동잎엔 빗소리 요란도 하이" 조선의 대표적
시인 서거정도 "수기"란 시에서 낮잠을 즐기며 한더위를 피해 지내던
시골의 한정을 이렇게 읊었다.
옛 시인들은 이처럼 삼복더위를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숨어들어 여유를
즐겨가며 살았다.
그들이 "피서"란 말대신 "은서"라는 말을 즐겨 썼던 까닭도 잠시나마
시끄럽고 번잡한 사회를 떠나 한적한 자연속에서 은자처럼 세태인정을
관조하며 심신을 수양하는데 뜻을 둔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은서"란 양반관료등 일부 지식계층의 "수양"이었지 일반
서민들도 즐길 수 있는 "놀이"는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자나무그늘 밑에 평상을 내다놓고 더위를 식히며
부채질을 하거나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이 일급 피서였던
셈이다.
잘 때는 죽침을 베고 죽부인을 안고 잤다.
외출할 때는 등나무로 만든 등걸이와 등토시위에 풀먹인 모시옷이나
삼베옷을 입고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삿갓을 썼다.
음식에도 신경을 써 개장국 육개장 계삼탕 팥죽등을 복날 별식으로
삼아 이열치열로 몸을 보하려했다.
본격적 휴가철을 맞아 국내외 피서지로 향하는 인파가 들끓고 있다.
고속도로는 줄을 이은 차량행렬로 거북이걸음이고 공항도 연일 만원이다.
더위를 못참아서라기 보다 더위를 즐기기 위해 고생길도 감수하겠다는
생각보다 더 역설적인게 또 있을까.
국내외 피서지는 이미 조용하고 한적해 몸과 마음을 쉬게 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수양"이 아니라 "놀이"가 돼버린 피서객들의 행태를 보면서 피서다운
피서를 하려면 상급풍류인 "은서"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