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독지역 라이프치히시 시내 중심지에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

라이프치히 오페라하우스 뒤에 자리잡고 있으며 맞은 편에 중앙우체국,
양 옆으로는 중앙역과 오케스트라 하우스, 라이프치히대학 본관 등이 위치한
이 목좋은 레스토랑의 이름은 "레스토랑 김".

한국인 김기숙씨가 운영하는 라이프치히의 명물이다.

김씨가 끈질긴 집념으로 사업권을 따내고 영업을 시작한 "레스토랑 김"을
모르는 라이프치히 사람은 이제 없다시피 하다.

지난 90년 하노버에서 이곳 라이프치히로 옮겨와 사업을 시작한 김씨는
93년 시에서 제정한 150명의 라이프치히 인물로 선정될 정도의 유명인사가
됐다.

지난 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동서 긴장완화의 신호탄이었다.

90년 당시 하노버 근처의 소도시에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던 김씨는
옛 동독지역인 라이프치히에서의 사업이 유망할 것으로 보고 시청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는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예상했던대로 회답이
없었다.

김씨는 생각을 달리하여 상공회의소의 협조를 얻어 직접 라이프치히
시청으로 답신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90년 5월 어느날, 라이프치히에서 회답이 왔다.

그러나 고대했던 라이프치히에서의 면담은 무언가 심문받는 것 같은
분위기로 기억되고 담당자는 무역에 관해 별 관심이 없는 듯 차후 기회를
보자며 끝냈다.

그래도 김씨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여가가 있을 때마다 라이프치히를
왕래하며 관련 인사들과 교제를 계속했다.

90년 8월 초순께 김씨가 라이프치히에 도착했을때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됐다.

시청에서 국영기업을 민영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국영기업을 경쟁입찰 방식으로 일반에게 매각한다는 것이었다.

김씨도 신청용지를 받아 공고한 경매물 중의 한 건물을 지목하여 기입란에
적고는 목적란에 아시아식 레스토랑이라고 적어 제출했다.

친지들의 권유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도 도움이 돼
전망좋은 사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입찰 경쟁률은 62대 1로 매우 치열했으며 경쟁자들은 대개가 서독 사람들
이었다.

나머지는 일부 인근 국가 사람이나 미국 영국인이었고 아시아인은 김씨
하나였다.

어느 면을 보더라도 김씨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경쟁이었다.

그렇지만 입찰을 따낼 수 있었다.

그 동안 수십회나 라이프치히를 왕래하면서 꾸준히 노력한 덕분이었다.

90년 9월 임대계약을 했다.

그런데 건물이 계약됐다는 소식을 접한 커피숍 측에서는 김씨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행위를 시작했다.

건물 앞에는 검은 기를 걸고 외국인은 나가라는 표지판을 창문마다 걸어
놓았다.

아직도 통독 이전인 현지 신문에서도 한국인 김씨가 라이프치히의 명물
커피숍을 차지하였다는 불만조의 기사가 게재됐다.

며칠 뒤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면서 구 동독지역인 라이프치히에도
신탁관리청이 설립돼 국영기업을 관리하게 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탁관리청에서 1차로 공고한 경매물에 김씨가
계약한 건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통일전에 라이프치히 시청과 계약한 권리를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결국 김씨측에서도 소송제기 까지도 불사할 정도의 강경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신탁관리청은 경매물 공고를 취소하고 김씨의 통일 전 권리를
인정해 줬으며 영업과 시위를 거듭하던 커피숍 측에서도 인수인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로소 김씨는 내부수리와 시설공사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지루하고 까다로운 허가문제로 시설공사의 시작은 마냥 지연되기만
했다.

시설 허가가 나자마자 김씨는 밤낮없이 동서독을 내달려야 했다.

일은 동독사람이 맡았으나 당시 동독지역은 시설에 필요한 물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서독에서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또한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하루에 동서독을 왕래하기는 불가능
했다.

또한 시설 공사중에서 특별한 설치나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는 작업은
서독 사람을 찾아서 해야만 했다.

그런 때는 이들을 위한 숙박비도 계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독에서 방을 구한다는 일은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와 인부들은 실내 공사장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일이 많았다.

시설공사를 하는 동안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일요일은 휴일이지만 월요일은 인부들이 월요데모에 참가한다고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도 월요일에는 불안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데모에는 외국인 반감 내용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보험도 가입했었지요.

다행히 시설공사가 끝날 때까지 큰 일 없이 무사히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91년 7월 그는 숙소를 구할 수 있었으며 8월에는 드디어 레스토랑을 개업할
수 있었다.

개업식에 그는 140명을 초대했다.

개업식에는 라이프치히 시장을 비롯한 각계 초청인사들이 대부분 부부동반
하여 참석했으며 많은 교포들도 멀리서 찾아와 대성황을 이루었다.

레스토랑은 개업 첫날부터 초만원을 이뤘으며 신문 월간지 등 미디어를
통한 소개및 선전과 함께 고객들의 입에서 입으로 레스토랑 얘기가
전해졌다.

처음에는 종업원들 사이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점차 좋은 분위기로
일하게 됐다.

종업원은 모두 27명인데 독일 아가씨들은 손님 시중을 들고 나머지
종업원은 주방에서 일을 한다.

주방에는 여러나라 사람들이 있으나 어려움없이 한가족과 같은 분위기로
일한다.

"저는 항상 한국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평소에도 친절에 소홀함이 없었으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개업식날 알게된 각계 인사들은 물론이며 다방면으로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가질 뿐만 아니라 시민을 위한 각 단체에도 협조하면서 지역 생활에 손색이
없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라이프치히시에서도 인정을 받을 것이며 한국의
이름을 더욱 빛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92년 2월 라이프치히 고아원과 양로협회를 방문하였으며 정기적으로
이들에게 협조하고 해마다 각각 두차례 레스토랑에 초대하여 대접도 한다.

어느덧 라이프치히시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적대시하던
시민들도 그에게 접근하게 됐다.

92년 12월 오페라하우스에서 커피숍을 설립할 계획이라며 이의 운영을
제의받았다.

그는 계약했으며 시설공사를 했다.

이듬해 5월 개업했다.

물론 경쟁자들이 많았지만 오페라하우스에서 그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라이프치히의 유명인사가 됐으며 다방면으로 각계인사와 교제하면서
전직이었던 무역에 관심을 갖게되어 93년 8월 PTR라는 무역중개 사업소를
개업하여 활동하고 있다.

93년 10월에는 라이프치히시에서 출판된 라이프치히 인물이라는 책에 그도
수록되어 사진과 가족도 소개됐다.

라이프치히 시에 따르면 그의 경우가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라이프치히 시장을 비롯, 149인의 저명인사가 실려 있다.

그는 93년 10월 라이프치히 기업인 협회에도 가입했다.

그리고 같은 달 한독친선협회에도 가입했다.

그해 11월에는 재독한인협회 고문이 됐다.

94년 9월에는 "라이프치히 김" 체육관을 개관했다.

얼마전 일요일 그는 라이프치히의 복지단체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어려운
사람 130명을 초대하여 대접했다.

일요일의 레스토랑 휴업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렇듯 시민을 위한 봉사도 꾸준히 하면서 라이프치히 시와 복지단체에
대해서도 협조하고 있다.

이제 "레스토랑 김"이나 "오페라하우스 커피숍"의 모든 종업원들은 "김"
이라는 직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종업원들이 어디를 가든 김에서 일한다고 하면 칭찬을 받는다고 한다.

김기숙씨는 라이프치히의 가장 모범적인 기업가 중의 한사람으로 굳게
자리잡았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