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대옥 아가씨, 먼저 왕유의 시 전집을 빌려주세요.

제가 읽고 암송하여 머리속에 넣을게요"

향릉의 부탁에 대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단 왕유의 시를 읽고 와서 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군.

얘, 자견아, 내 서재에 가서 왕우승의 오언율시집을 가지고 오너라"

옆에 있던 시녀 자견이 대옥의 지시대로 시 전집을 가지러 갔다.

"근데 왕유의 시전집을 빌려준다고 해놓고는 왕우승의 시 전집이라니요?"

향릉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왕우승이 왕유지 누구야?

우승은 벼슬 이름이잖아.

왕유를 왕마힐이라고도 하는데 마힐은 그의 자이고.

향릉이 좋아 했다는 육유도 육방옹이라고도 하잖아.

이태백은 이청련이라고도 하고"

향릉은 한 시인이 여러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왕우승처럼
벼슬 이름이 붙은 경우는 처음 보는 셈이었다.

자견이 왕유의 시 전집을 가지고 오자 대옥이 그 책을 향릉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시 전부를 다 읽고 암송할 생각은 말고 내가 붉은 먹으로
동그라미를 친 시들만 읽고 암송하라구.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그 시들을 한 수 한 수
꼼꼼이 읽고 암송한 후에 다시 내게로 와서 그 시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자구"

말하자면 대옥이 주입식으로 향릉에게 시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향릉
스스로 깨우치도록 도우려는 것이었다.

향릉이 두꺼운 왕유의 시 전집을 들고 형무원으로 돌아오는데,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같은 기대감으로 가슴이 뿌듯하여 터질 것만
같았다.

바라다보이는 대관원의 모든 풍경들이 다 시가 되어 향릉의 몸속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어릴 적부터 이런 세계를 맛보며 자란 보채 아가씨나 대옥, 탐춘 같은
아가씨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그런데 향릉 자기는 어릴 적에 인신매매단에 납치를 당하여 열 살도
되기 전에 겁탈을 당하고 이 삭막한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이 아닌가.

시인들이 노래하는 세계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런 가운데서도 맑은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쓴 덕분에 이렇게 시를
마음껏 읽고 배울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향릉은 왕유의 시 전집을 꼬옥 가슴에 껴안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