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94년 겨울.

양복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은채 광화문 뒷골목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 젊은이의 심정은 매서운 바람으로 더욱 착잡하기만 했다.

그런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뒤편에는 한 은행의 본점건물이
냉정하리만큼 우뚝 솟아 있었다.

"일은 따분했지만 그래도 안정된 직장이었는데..."

"내일 모레면 결혼식도 올려야 하는데..."

계획된 일이었으나 막상 사표를 던지고 나오자 홀가분하다는 기분보다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다가왔다.

하지만 얄밉도록 푸른 하늘로 눈을 돌리자 어느새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제 나의 운명은 저 하늘에 있다"

아시아나 항공 부조종사 금경호씨(29).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그의 전직은 동화은행 국제부 계장이었다.

"뭐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92년 방배동 지점에 있을 때 친구가 조종훈련생 채용시험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조종사야말로 전문성이 보장된 직업이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치 무언가에 씐 것처럼 여기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늘에 대한 동경도 있는 법이고요"

"친구따라 강남 간" 꼴이 된 금씨는 매일 밤 9~10시에 끝나는 고된 업무의
와중에서도 주경야독으로 시험준비를 해 93년 가을 6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아시아나 조종훈련생 채용시험에 합격한다.

(하지만 그친구는 중도에 고시로 길을 바꿔 현재 고시생에 머물고 있으니
자신은 강남에 못가고 친구만 보낸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비행기가 활주로에 연착륙하기 위해 수많은 먹구름을 지나야하듯
정식 조종사가 되기 까지 그가 밟아온 과정도 결코 수월치는 않았다.

94년3월~5월.

아시아나 입사와 동시에 조종사 양성 기초훈련과정인 "AB-INITIO
("처음부터"라는 뜻의 라틴어) TRAINING"에 들어갔다.

복잡한 항공기구조및 시스템, 세븐 마일 클리어(기상조건최상), RTB
(리턴 투 베이스:귀환), 마마(모기지) 등 생소한 항공관련 용어 등을 마치
고3 입시생처럼 달달 외워야 했다.

그해 5월~95년2월.

신혼 4개월의 단꿈을 뒤로 하고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에 있는 세계적
조종사 양성기관인 "플라이트 세이프티 인터내셔널"에서 위탁교육을 받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공항에서 민망할 정도로 펑펑 울어대는 아내를 위로하는 그의 마음에도
눈물이 흘렀다.

신혼의 생이별, 부친의 사망소식, 첫 비행의 긴장과 감동, 신문지로
유리창을 가리고 비행하는 계기비행, 연일 계속되는 테스트.

그렇게 9개월.

2월~96년7월.

민항기 조종사가 처음 타게 되는 승객정원 160명짜리 보잉737기 조종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교통부가 주관하는 세번의 자격시험과 서울~부산간 50회 숙달훈련도
무사통과.

2년3개월여의 훈련과정을 마친 금씨는 이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절도가
넘치는 햇병아리 부조종사 됐다.

"선배들, 12명의 동기들, 조종사에 대한 집념이 고된 훈련기간을 떠받쳐
주었습니다.

기량과 지식과 인덕을 겸비한 최고의 프로페셔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금씨는 조종사 지망생을 위한 한마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어학실력과 신체적인 조건만 맞으면 누구든지 할수 있습니다.

21세기의 꿈과 미래, 하늘에서 찾아보면 어떻겠습니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