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화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고종19)이다.

임은군란때 한국에 파견된 군중국 광동성 수사제독 이장경 휘하의
조래를 따라 들어온 40여명의 상인이 한국화교의 원로가 되었다.

중국 청나라른 그해 대한제국 조정에, 통상교약 (상민수육무역장정)
체결을 강요함에 화교 진출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에 따라 그다음해에는 서울 인천 부산 등 주요 도시에 210명의 상인과
111명의 관리가 주재하게 되었다.

그뒤로 화교수는 해마다 급증했다.

그와 더블어 화상조역지가 1884에 인천.87년에 부산.89년에 원산에
잇따라 철치되어 당시 상업을 천시하던 한국의 상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1923년의 조선총독부 통계가 서울과 인천의 화교 6,000명이 그동안
본국에 송금한 액수를 당시의 일화로 1,000만엔 (지금의 100억엔 상당)을
줄잡았던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이익이 엄청난 것이었음을 알수 있다.

광복후에는 남한지역의 화교수는 계속 늘어나 오다가 1973년의
3만5,000여명으르 정점으로 그 이후에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가
되었다.

지금은 남한에 3만여명이 정주하고 있다.

출산에 의한 화교인구의 자연증가를 감안한다면 엄청난 비율의 감소다.

흔히 한국정부의 화교에 대한 세제상 불평을 대우때문에 상권을 잃고
해외로 이주하는 화교들이 늘어난 것이 그 주원인이라고들 한다.

그 결과 화교들이 정착에 실패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렛펠이
붙게 되었다.

반면 세계 도처에 진출한 화교들은 온갖 박해를 굳굳히 이겨 내고
뿌리를 깊이 내렸다.

오늘날 동남아 각지에서는 화교재벌들이 탄생되었는가하면 미국과
유럽 몇몇 나라의 대도시들에는 동남아에 버금하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경제적 번창을 누려왔다.

특히 동남아지역에서는 화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18세기 후기에는 샴 (태국)과 보르네오섬에, 19세기에는 말레이반도에
각기 화교왕국이 세워졌고 오늘날 싱가포르에서는 정치지배세력이
되었다.

화교가 이질사회에서 자리를 잡을수 있었던 것은 혈연단체 지연단체
비밀결사 중화총상회 동업조합 상호부조조직등을 중심으로 결속되고
학교 교육을 통해 전통문화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런 화교의 끈질김이 유독 한국에서만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오래전에 서울의 중심가인 태평로와 서소문 일대에서 밀려난 화교들이
서대문구 연남동에 새로운 차이나타운을 형성해 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과거의 번창을 되살려낼수 있을런지 관심이 가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