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의 해외진출은 이제 "진출"이라기 보다 "탈출"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절박성까지 띠고 있다.

최근 TV브라운관용 수정진동자를 생산하는 고니정밀이 국내 상장회사
로서는 처음으로 사업본거지를 인천에서 중국 연태로 옮기는 사실상의
"본사이전"계획을 발표한 것도 저간의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해외탈출의
성격이 짙다.

생산성을 앞지르는 임금상승,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값으로 인한 공장
부지확보의 어려움, 가장 높은 물류비용, 여기에 각종 규제가 기업활동의
발목을 잡는 현실에서 국내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은 아시아
개도국으로 눈을 돌리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다.

물론 해외투자는 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라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

우리기업의 해외 직접투자 누계액이 지난 6월말 현재 200억달러를
돌파한 것도 최근 우리기업의 해외진출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또
규모면에서도 대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의 해외투자가 이처럼 크게 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전세계 해외 직접투자총액의 1%에도 못미치는 수준임을 감안할 때
국내산업의 공동화를 초래하지 않는 범위에서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을
오히려 권장해야 할 입장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국내 노동비용의 지속적인
상승이 우리기업을 해외로 내모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고니정밀의 경우도 원부자재 구입이 쉽다는 등의 몇가지 다른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사까지 이전키로 한 데에는 국내근로자
인건비의 13~20%수준(20만원)으로 대졸사원을 채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회사측은 밝히고 있다.

이처럼 기업이 인건비부담을 덜기 위해 현지 외국인근로자를 직접
찾아나서게 된 것은 최근 국내 외국인 근로자들의 임금마저 급상승해
내국인 근로자의 70~80%선인 월평균 60만~70만원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추진되고 있는 노동법개정과 관련, 재계가 임금안정을 위한
제도적 장치마련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임금문제가
기업경쟁력의 핵심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와관련, 노-사-공익대표 협의체인 국민경제사회협의회가 어제
쟁점사항에 대해 노사간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것은 원만한 노동법 개정작업을 위해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만 우리가 노동법 개정작업 당사자들에게 특별히 주문하고 싶은
것은 근로자의 인권 복지향상 못지 않게 임금인상을 둘러싼 노사간의
소모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마련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지속적이고도 빠른 임금상승이 우리기업에 가져다줄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기업의 해외투자가 뚜렷한 비전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임금에 쫓긴
비상탈출구로 이용되는 현실을 방치해 놓고 "우리나라를 기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아무리 다짐해 본들 누가 믿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