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동양매직 수원공장의 세탁기개발팀장으로 취임한 임태경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이 근질근질 가렵기 시작했다.

허물도 벗겨지려고 했다.

실험실에서 옆에 있던 심대리에게 물어봤다.

"심상천씨, 내 손좀 봐"

"그건 약과예요"

그가 내미는 손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주부습진"은 세탁기팀의 직업병이다.

하루에도 몇번씩 바세린로션을 바르며 "광적으로" 손을 관리하는 3명의
처녀 여직원들을 제외한 팀원 전원이 환자다.

거듭되는 실험으로 손에 물이 마를날이 없기 때문.

연구소에서 세탁기팀원을 구별하는 방법은 또 있다.

이들의 작업복에는 희끄무레한 보푸라기가 앉아 있는 것.

실험에 쓰였던 옷이란 증거다.

세탁 실험이라는 게 극한 상황을 상정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험에
들어갔다 나온 옷은 웬만한 "건강체질"이 아닌 한 성할수가 없다.

"두꺼운 겨울점퍼가 너덜너덜 헤진 경우도 있지요.

처음엔 좋다고 옷을 벗어주던 타부서 직원들이 이젠 세탁을 해주겠다면
꼬리를 말기 바쁩니다"(김경수대리)

동양매직 세탁기팀은 "폭포봉세탁기"의 개발로 유명하다.

전 팀원이 고양시 동양매직 연수원 지하실에서 4개월간 외출.외박도 못하고
개발한 이 제품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봉"방식에 폭포수류를 채택, 엉킴이
없고 세제가 잘 녹으며 공기방울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국산신기술(KT-MARK)상 과기처장관상 신기술협동상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장상 등 기술에 관련된 국내외 온갖 상을 휩쓸었다.

시장점유율은 아직 가전3사에 비해 미미한 편이지만 제품에 대한
자부심만은 대단하다.

"제품은 최고예요"(김희정)

김희정씨의 업무는 국내외 제품들을 모두 들여다 놓고 직접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체크하는 일.

그녀가 최고라면 최고인 거란다.

요즘 세탁기팀은 매우 바쁘다.

눈코 뜨지 못할 정도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세탁봉" 트랜스미션을 국산화해 "올해의 발명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 가을 시판을 목표로 이 기술을 채택한 신제품을 한창
개발하고 있는 것.

일명 "H 프로젝트".

여름휴가도 반납했다.

"개발일정 때문에 데이트할 시간이 없어요.

세탁기가 애인이라고나 할까요"(지한석)라는 푸념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지씨는 폭포봉세탁기 개발때 연수원지하실에 갇혀 연일 토의와
실험에 시달리면서도 사랑의 싹을 틔운 전갑현씨에게 한 수 배워야 할 듯.

당시 개발을 마치고 연수원을 나올 때 유난히 아쉬워하며 손을 흔들던
영양사아가씨는 이제 그와 한 침대를 쓰고 있다.

< 글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