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이 꿈틀댄다.

가느다란 선이 화폭을 채워나간다.

그 선들의 조화속에 평범한 시민들의 갖가지 표정이 하나씩 살아난다.

최호철씨(32).

화가라기보다는 만화가로 불리기를 바라는 이색 미술인.

홍익대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만화라는 장르를 새롭게
변신시키겠다는 야심에 들떠있는 젊은이다.

그가 전공인 회화에서 만화로 방향을 바꾼 것은 무엇보다도 "선"이 주는
매력 때문.

굵은 선, 가느다란 선, 강렬한 선, 부드러운 선.

정형화된 회화의 틀보다 다양한 선이 표현하는 생명력에 빠져든 탓이다.

"선으로 표현하는 그림방식에 매료됐죠.

더구나 어렵고 현학적인 모습보다는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수 있는
친근한 방식도 원했고요"

만화를 선택하게 된 동기다.

지난해 신한은행이 주최한 만화현상공모전에서 그는 "자전거 나들이"라는
작품을 제출해 최우수상을 탔다.

지금은 한겨레문화센타에서 만화강좌를 맡아 시민들에게 만화와 친숙해지는
방법을 강의한다.

최근 창간된 문화잡지 이매진 8월호에 "식모촌 여배우 실종사건"이란
현실비판적인 단편작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젠 어엿한 만화가인 셈이다.

즐겨 그리는 소재는 지하철과 달동네.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 배어있는 현실의 공간이다.

거기서 그는 "구영탄"이나 "최강타"같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아닌 우리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주인공만 부각되는 영웅담이 아니라 모두가 다 주인공인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지하철내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재빨리 스케치북에 크로키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중의 하나.

대학때부터 시작한 인물 크로키 스케치북이 이젠 75권째에 달할 정도다.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책을 읽는 학생, 전도를 하는 종교인,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술에 취해 넋두리를 내뱉는
아저씨.

그의 스케치북은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있는 박물관이다.

그 속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짐짝처럼 실려 지하철을 타고 있는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도 담겨있다.

한때 만화영화사를 다닌 경력을 가진 그는 얼마전 개봉된 장선우감독의
"꽃잎"에서 애니메이션을 담당하는 재주를 발휘하기도 했다.

시각매체라는 점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 작업이 동일한 탓일까.

현재 민족미술인연합회원이면서 우리만화발전을 위한 연대모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 그는 만화계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담당해야할 일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대중만화이지만 소비자들의 말초적 신경만 자극하는 상업만화의 틀을
깨겠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전태일 열사의 삶을 만화로 그려보고 싶어요"

삶의 현실에 바탕해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들의 기쁨을 배가시키며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그런 작가로 남고 싶다는게 포부다.

오늘도 지하철 어딘선가 그는 스케치북을 메고 사람들의 삶을 담는다.

일상생활에 찌들었지만 그 속에 담긴 건강한 표정의 의미를 찾기 위해.

< 김준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