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가 가뭄을 잘 다스렸다던 요순임금의 치수치적은 오늘날에도 아시아
각국 지도자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필리핀의 라모스대통령도 ''카섹난댐과 수력발전소건설''을 국책사업으로
추진, 이 나라의 고질병인 홍수와 한발을 퇴치한 지도자로 기억되기를
염원한다.

''카섹난프로젝트''를 맡은 해결사는 바로 한보건설(구 유원건설).

그러나 마닐라에서 동북방향으로 200km 떨어진 판타방간과 카섹난지역에
걸쳐있는 공사현장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 해결사의 역할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 짐작이 갔다.

현장까지는 차량으로 무려6시간이 걸렸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개조차량들이 가득한 2차선 도로를 곡예운전으로
뚫어야 했다.

한보측이 진입로를 닦아놓아 그나마 시간이 단축된 것이다.

도로변에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날림 건물들이 즐비했고
옷가지를 제대로 걸치지 않은 원주민들이 그 속을 들락거렸다.

8월의 현장은 터널과 댐공사에 앞서 건설되는 진입도로 마무리공정이
한창이다.

한국근로자 19명의 지시아래 600여 현지근로자들이 도로위에서 불도저와
굴삭기로 분주하게 땅을 파고 다진다.

터널입구공사현장에선 굴삭기들이 벽면을 보기좋게 반듯하게 깎아내린다.

다음달에 이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인 총연장 27km에 이르는 터널굴착에
착수하기 위해서다.

한보가 자랑하는 TBM(Tunnel Bawling Machine)터널굴착장비는 이때
필리핀에 처음 공개된다.

카섹난프로젝트는 해발 1,900m의 산악밀림지역에 유역변경식 댐과
터널을 건설, 북부 카섹난강의 물길을 남서쪽 평야지대로 돌려 관개용수
및 전력생산에 이용하려는 계획.

수주금액 2억5,000만달러에 이르는 이 프로젝트 추진에는 군소교량을
포함한 총연장 80km의 진입도로 댐 2개 터널 지하수력발전소 등 크게
4가지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토목공사의 전장르가 동원되는 셈이다.

오는 99년말 카섹난프로젝트가 완공되면 필리핀은 풍부한 강우량을
십분 활용, 벼3모작농사가 가능해 진다.

계량적으로는 5만ha의 땅을 개간하는 효과를 가져와 식량증산에 기여하고
150MV의 전력을 공급, 산업발전의 터전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 추진에는 요순시대의 "원시와 야만성"과 현대의
"이해타산성 민원과 요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선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대로 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라는 점이다.

민간인의 총기소지가 허용돼 곳곳이 치안부재상태.

현장주변에 거주하는 부칼롯족은 영역 침입자의 목을 베는 헤드헌터족으로
악명높다.

일부 강경론자들이 살의를 번득이며 공사중단을 요구, 한보측은 선물
전달, 복지시설건립 및 부족원 고용 등 친선책을 펴고 있다.

열대 밀림지역에 서식하는 각종 동물과 곤충류, 5명의 직원이 감염된
바 있는 말라리아도 무서운 적이다.

현장주변 밀림을 거점으로 암약하는 반정부세력 신인민군(NPA)은
더욱 위험한 복병.

경찰은 신인민군이 공사관계자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탐지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때문에 한보측은 현지인경비원을 한국근로자 수의 두배가 넘는
47명이나 채용했다.

"인부들중에도 신인민군 관련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정부와 신인민군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펼칠수 밖에 없다"고
송영일현장소장은 말했다.

통신부재, 관료주의도 깊은 수렁.

장비도입 허가를 얻기 위해 당국에 전화를 걸면 으레 불통이며 담당관리를
찾으면 자리에 없다.

환경보호론자들의 개발반대 목청도 드높다.

이에따라 한보측은 환경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댐규모를 축소했고
발전소도 지하에 건설하는 등 환경보전 노력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현대적인 명제앞에서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이 모든 장애앞에서 한보측은 물러설 수 없는 "배수의 진"을 쳤다.

당초 공사를 추진했던 유원건설이 부도를 내고 한보에 인수된 후
맞이하는 첫 "재기전"이기 때문이다.

또 이 공사를 디딤돌로 동남아시장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난관들은 한갓 돌파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 유재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