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6.25전쟁 중에 학제가 바뀌면서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시대가 아무리 험하고 제 아무리 취미가 중요해도 학생의 본분은 역시
공부를 잘 해서 바라는 학교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임시로 세운 판잣집 학교의 교육이란 짐작하듯 부실하게
마련이었다.

그런 시절에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부산 피란학교 시절, 휘문의 대선배인 이종근선생님은 나를 포함한
진학반 지도에 남다른 정성을 쏟으셨다.

경성제국대학 응용화학과를 나오신 이 선생님은 본직인 중앙공업연구소
일만으로도 힘드셨을 터인데 특별수업까지 해주시어 어린 후배들에게 먼
앞날을 위한 면학을 독려하셨다.

나는 그런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명받아 애지중지하던 취미 기구들을
모두 궤짝에 담아 못을 치는 결심을 보였다.

그러다 며칠이 못 가서 다시 풀어보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했지만, 이
선생님의 열성적인 가르침은 나의 단순한 취미를 학문을 통해 전공의
길로 이끄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이 국지전 양상으로 바뀌며 38선을 경계로 톱질을 하듯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3년 3월, 나는 피란 수도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비록 전쟁중이긴 했지만 축하할 만한 좋은 출발이었다.

그 때 나는 무선 분야에 매력을 느껴 통신공학과를 선택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주위 어른들의 생각은 나와 달라 결국 나는 세칭 일류 학과에
지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아껴주시는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간 1953년 여름,휴전이 되면서 정부 대학 그리고 나도 서울로
돌아왔다.

그 때의 서울은 폐허 그 자체였으며 우리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풍지박산이 된 집을 수리하기엔 엄두가 안 나셨는지, 아니면 당시 경기도
노해면 신공덕리에 있는 서울공대 통학에 편하게 해주시려 했는지 어른들은
내가 올라오기 전에 집을 옮겨 놓으셨다.

그래서 서울에 돌아온 곳은 태어나 자라던 종로의 사직동이 아닌 동대문밖
창신동이었다.

그리 많던 책들과 취미 기구들은 물론이고 내 어릴 적 사진이 귀한 것도
바로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탓이다.

그러나 어찌 그 사진 따위를 말하랴.그 전쟁으로 잃어 버린 사랑했던
이웃과 친구들은 또 몇몇인가.

누구나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

내게도 세검정 냇가에서 물장난 치며 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늘 눈에
선하다.

그러나 그런 기억의 한 구석에는 그 시절의 대개의 부모들이 그랬듯이
전쟁으로 가재를 잃어 생계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전과 다름없이
자식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부모님의 고초를 헤아리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며 철없던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죄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1954년, 대학 2학년생이 된 나는 여기저기 숨어서 즐기던 아마추어
무선의 취미활동을 양성화하기 위해 피란시절 함께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강기동 이동호 김동주 등과 단체를 조직하고 정부 당국에 호소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아마추어 무선 동호인을 규합해 나갔으며 무선을 취미로 한다면
모두가 가까이 하기를 꺼리던 시국이라 이 단체의 방패가 되어줄 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때 아마추어 무선에 대한 이해를 하고 물심 양면으로 도와준 분으로는
기독교방송국의 이덕빈, 서울중앙방송국의 이중집씨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분들의 주선으로 우리는 당시 공보처 이인관 기감님을 만나게 됐고
결국 이사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부이사장에는 김규한 한진동, 감사에 김기선 이봉익, 나머지
이사진으로 이덕빈 이중집씨, 학생으로는 서울공대의 강기동 김동주 서정욱,
한양공대의 윤은상 조찬길 등이 1955년 4월에 한국 아마추어무선연맹
(Korea Amateur Radio League)을 출범시켰다.

당시는 아마추어 무선에 관한한 체신부의 동의없이는 아무것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마침 일제 때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3극관의 증폭 이론으로 학위를
받은 조응천박사가 체신부 차관으로 계셨고 관련 국장에는 박조욱씨,
최준식과장, 이봉익 김길식계장 등 체신부 관료들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미8군 부사령관 콘웨이(Conway)중장과 주한 미국 대사 포터
(Porter)씨는 열렬한 아마추어 무선 애호가로서 KARL의 클럽국 HMOHQ에
장비를 기증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햄(HAM)으로 알려진 아마추어 무선사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순수하게 무선에 흥미를 느껴 통신 훈련과 기술적 연구를 하는
일종의 취미 집단이다.

그러나 아마추어 무선사들은 단순한 취미를 벗어나 전쟁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

이번 경기 북부 지역 수재에서도 햄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알려진 바와
같다.

또 햄은 전파의 공공성 확대와 통신 방식의 진보를 위해 연구 개발에도
많은 기여를 해왔다.

따라서 무선 통신의 혁신은 곧 햄들의 개척 봉사 및 희생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이전에는 정부가 아마추어 무선사들에게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주면서도 무선국은 허가하지 않았다.

다만 KARL에 단체국 형식으로 HL9TA를 허가했고 일부 공업계 고등학교와
대학 사관학교에 실험 무선국 형식으로 햄 활동을 사실상 묵인해줌으로써
무선을 취미로 하는 청소년들의 앞날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일부 미국인에게 개인으로 아마추어 무선국을 허가한
것을 빌미로 우리에게도 개인으로 아마추어 무선국을 허가하라고 집요하게
대정부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처럼 무선 활동에 대한 나의 열정과 활동이 강도를 더하면
할수록 내게는 취미 활동과 학교의 전공 공부가 엇갈려 있다는 것이 늘
갈등이고 불만이었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의 공부를 대학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학 4년 동안 나는 전기공학과 공부와 직접 관계가 없는 무선 분야의
활동에 더 열중했다.

당시 전기공학과는 전동기 발전기 변압기 발전 송배전 등 전력 분야가
주류였다.

그렇다고 선생님과 학우들을 등지고 전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때 전력 분야를 공부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학문적 기반을 넓혀 오히려 통신 분야에 대한 내 꿈을 펼치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서울 공대 전기공학과에서 사사한 우형주선생님의 가르침과 편달은
서울공대 전기과 11회 동문 모두가 입은 평생의 은혜다.

대학 3학년 때인 1955년, 나는 이중집씨의 주선으로 당시 서울 청량리에
있던 체신부의 용산 송신소에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용산 송신소에는 여러대의 BC-610이 있어 우리 나라의 기상
데이터를 30분마다 전세계에 무선으로 전파하고 있었다.

당시 송찬복소장은 여러 모로 나에게 관대했다.

나는 BC-610의 운용과 정비를 마음껏 해볼 수 있다는 욕심에 고참들의
숙직까지 대신 서주며 고장난 무선기를 밤새워 수리하고, 기능 확인을
위해 HL9TA라는 호출부호로 햄 교신을 제법 즐겼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한껏 빠져버린 전자 통신 분야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망과 병역을 필해야 한다는 의무 사이에서 진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었으며 지금처럼 선택의 폭이 넓지도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1957년초, 전기공학과 4년 선배인 당시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에 있던 백영학 선배가 공대를 찾아와 신상철 교장의 교관 유치
계획을 소개하면서 공사에 올 것을 권유했다.

이에 동기인 김동주 이동우군과 함께 그해 4월부터 장교 훈련을 받고
8월에 임관해서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항공공학과 교관으로 배치되었다.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가서는 통신공학 교관이 되면서 실험실 관리도
맡았다.

그리고 HL2AO라는 호출부호의 실험 무선국을 차려 놓고 전세계를 상대로
교신을 하는 등 무선 활동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신임 소위의 열의가 아무리 차고 넘쳤다고 해도 군사 기관인
사관학교 안에 개인 무선국이나 다름 없는 실험 무선국을 설치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만큼 신상철 교장님의 아낌과 뒷받침이 남달랐다는 얘기다.

정부로부터 정식 아마추어 무선국 허가를 받아내겠다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의 집요한 노력은 그 뒤로도 몇 해에 걸쳐 계속 되었다.

마침내 1960년, 정부가 개인에게도 아마추어 무선국을 허가한다고
했을 때 정작 나는 미국 유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불씨로 남아 일본이 걸어오는 독도 영유권 시비에
덧붙여 말하면 1962년에 KARL의 젊은 회원들이 이동 무선국(HM9A)을
독도에 차려놓고 전세계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전파로 알린 바 있다는
사실이다.

그 무렵의 나는 미국 유학 중이었으므로 아쉽게도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때 후배들이 만든 QSL 카드를 나는 요즘도 감격스럽게
바라보곤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