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502) 제11부 벌은 벌을, 꽃은 꽃을 따르고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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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은 자세로 종이돈을 태우고 있었다.
종이돈을 태우는 것은 죽은 자의 저승길 노잣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장례식 때나 치르는 의식이 아닌가.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닌게 아니라 우관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공중에서 바람에
날리며 타들어가는 종이돈을 온 정성을 다해 지켜 보고 있었다.
종이돈 하나가 다 타들어가 재가 되어 흩어지면 또 다른 종이돈을
태우고, 우관은 그렇게 종이돈을 태우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 듯이
뭐라뭐라 애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우관의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하여 보옥이 가슴이 찡 울리는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우관에게 더 이상 다가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훔쳐보고만
있는데 난데 없이 저쪽 산모퉁이에서 할멈 하나가 달려 오더니 우관을
향해 욕을 바락바락 해대었다.
"이년아! 네년이 어쩌자고 종이돈을 여기서 태우는 거냐?
아씨께 일러바치면 뼈다귀도 못 추릴거야.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이 못된 년이. 당장 아씨께 가자"
그러더니 할멈이 우관의이 머리채를 움켜 쥐고는 질질 끌고 가려고 했다.
우관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옥이 한발 나서며 할멈을 말렸다.
"왜 애꿎은 애를 잡아가려고 해?"
"이렇게 멀쩡한 대낮에 종이돈을 태우는데 가만 놔둬요?"
"종이돈이라니? 내가 볼 때는 그냥 종이던데. 대옥 아가씨가 글을 쓰다
버린 종이를 우관에게 태우라고 한 모양이던데"
보옥의 교묘한 변명으로 우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종이돈들은 이비 벌써 모두 불에 타버려 그 재만으로는 그것이
종이돈인지 그냥 종이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요. 대옥 아가씨가 시를 쓰다가 잘 되지 않아 버린 종이들을 나에게
주면서 태우라고 했어요.
덜 된 시를 누가 집어가면 안 되니까 으슥한 곳에서 태우라고 했어요"
우관마저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할멈은 할말을 잃고 우물쭈물
물러가버렸다.
둘만이 남게 되자 우관에게 물었다.
"너 누구를 위해 종이돈으로 소지를 한거냐?
바른 대로 말해. 네 부모냐 아니면 형제냐?"
"차마 제 입으로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도련님께 딸려 있는 방관이나 보채 아가씨 방에 있는 예관이는 제가
왜 이때쯤 소지를 하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그애들에게 물어보세요"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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