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산에 불이 났나 하고 급히 다가가 보니 우관이라는 시녀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종이돈을 태우고 있었다.

종이돈을 태우는 것은 죽은 자의 저승길 노잣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장례식 때나 치르는 의식이 아닌가.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닌게 아니라 우관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공중에서 바람에
날리며 타들어가는 종이돈을 온 정성을 다해 지켜 보고 있었다.

종이돈 하나가 다 타들어가 재가 되어 흩어지면 또 다른 종이돈을
태우고, 우관은 그렇게 종이돈을 태우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 듯이
뭐라뭐라 애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우관의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하여 보옥이 가슴이 찡 울리는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우관에게 더 이상 다가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훔쳐보고만
있는데 난데 없이 저쪽 산모퉁이에서 할멈 하나가 달려 오더니 우관을
향해 욕을 바락바락 해대었다.

"이년아! 네년이 어쩌자고 종이돈을 여기서 태우는 거냐?

아씨께 일러바치면 뼈다귀도 못 추릴거야.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이 못된 년이. 당장 아씨께 가자"

그러더니 할멈이 우관의이 머리채를 움켜 쥐고는 질질 끌고 가려고 했다.

우관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옥이 한발 나서며 할멈을 말렸다.

"왜 애꿎은 애를 잡아가려고 해?"

"이렇게 멀쩡한 대낮에 종이돈을 태우는데 가만 놔둬요?"

"종이돈이라니? 내가 볼 때는 그냥 종이던데. 대옥 아가씨가 글을 쓰다
버린 종이를 우관에게 태우라고 한 모양이던데"

보옥의 교묘한 변명으로 우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종이돈들은 이비 벌써 모두 불에 타버려 그 재만으로는 그것이
종이돈인지 그냥 종이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요. 대옥 아가씨가 시를 쓰다가 잘 되지 않아 버린 종이들을 나에게
주면서 태우라고 했어요.

덜 된 시를 누가 집어가면 안 되니까 으슥한 곳에서 태우라고 했어요"

우관마저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할멈은 할말을 잃고 우물쭈물
물러가버렸다.

둘만이 남게 되자 우관에게 물었다.

"너 누구를 위해 종이돈으로 소지를 한거냐?

바른 대로 말해. 네 부모냐 아니면 형제냐?"

"차마 제 입으로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도련님께 딸려 있는 방관이나 보채 아가씨 방에 있는 예관이는 제가
왜 이때쯤 소지를 하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그애들에게 물어보세요"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