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일컬어 "냄비경제"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쉽게 달아오르고 또 쉽게 식는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지 않나
걱정스럽다.

한국경제 위기론이 느닷없이 제기되면서 언론 국회 정부를 망라하여
모두들 냄비를 두드리듯이 위기론을 구가하였다.

경제위기란 학문적으로는 제대로 정의된 것이 없다.

마르크스경제학에서 주기적 공황을 위기라고 보는 경우가 있고 주류
경제학에서 2분기 이상 마이너스 성장할 경우 이를 경기침체라고 하는
정도이다.

한국경제가 물가와 국제수지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은 이미 지난해부터 예상되었다.

경기가 93년 2월부터 상승하여 지난해 3.4분기를 정점으로 하여 하강
하기 시작하였고 금년에는 7% 전후의 성장을 할 것이며 이 수준이면
연착륙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전망이라면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보아도 위기는 아니다.

반도체 철강 등의 수출이 부진하여 국제수지 적자가 100억달러 이상으로
심화되고 물가가 5%선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점이 당초 전망보다 약간
나빠진 것 뿐이다.

7% 성장이 6.8% 성장으로 내려갈 것으로 전망이 수정되었다 하여 위기론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런데 신문마다 방송마다 한국경제가 갑자기 꺼지는 것처럼 요란스레
두드리고 지난번 임시국회에서는 여야가 한 목소리로 위기라고 냄비를
두드렸다.

지난 봄까지만 하여도 정부는 한국경제는 다음세기초 G-7에 진입할
것이라고 요란스레 떠들다가 불과 몇개월 사이에 이렇게 급변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경제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이 증명되지도 않은 개념을
가지고 함부로 냄비를 두드려대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수개월 전에 기업의 투명성 제고라는 개혁안이 발표되어 논의되기
시작하자 이를 잠재우기 위한 고도의 수법으로 위기론을 전파시킨 것인가.

하여튼 이것이 경제부처 개각까지 몰고 왔는데 이는 온나라가 쉽게
G-7으로 갔다가 위기로 갔다가 하는 우를 범하는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안타깝다.

최근 다시 두드리고 있는 냄비는 과소비론이다.

국제수지 악화의 진범이 다름 아닌 소비자라는 것이다.

소비자는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에 두드리기가 편하다.

과소비 문제만 나오면 너도 나도 냄비두드리기에 참여하여 선량한
대부분의 국민들을 과소비 죄의식 속으로 몰고 간다.

소비자들이 사치성 소비재를 마구 수입해다 쓰고 몰지각한 소비자들이
충동 구매를 하여 소비증가율이 턱없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재 수입 증가율이 1~5월간 21.7%로 높기는 하지만 소비재의
수입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식량 사료 등이다.

선진국의 소비재 수입 비중은 20~30% 수준이다.

우리 국민이 특별히 사치 향락소비를 하는 국민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물론 소비자 중에는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와 향략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국민의 3% 이내이다.

이들은 대체로 불로소득을 누리는 소수 계층이다.

열심히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국민 저축률이
세계적으로 높은 30%대인 것이 말해주듯 근검 절약하고 건전한 소비생활을
한다.

문제는 소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경기가 좋을 때 평생소득이 높은 것으로
착각하여 내구소비재 구입을 늘리고 경기가 하강하여 소득이 줄어들면
평생소득이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여 갑자기 내구소비재 구입을 줄이는
등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노벨상 수상자인 프리드먼이나 모디글리
아니의 소득가설이다.

우리의 소비자들도 이러한 보편적 경향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경기와 관계 없이 증감하는 불로소득이다.

일한 대가로 받지 않은 불로소득이 있게 되면 그것으로 룸살롱도 가고
비싼 골프채도 사며 비싼 옷도 구입하게 될 것이다.

결국 불로소득이 문제이지 소비자의 과소비적 행태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지금과 같이 경기가 하강하는 과정에서 과소비론을 펼쳐 소비를 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소비증가율이 떨어지는 불경기에는 수요를 진작시키는 것이 도리인데
오히려 찬물을 끼얹는 격이기 때문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남이 냄비를 두드리니 나도 덩달아 두드리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러한 사고에 있다.

우리의 경제량은 크게 증가했으나 우리의 의식은 아직도 냉전시대의
흑백논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두드릴 때 내가 빠지면 나는 낙오된다는 생각이 그러한 냄비
두드리기 의식을 만들어 놓았다.

냉전시대에는 세상에 나와 적이 있을 뿐이다.

나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적이다.

따라서 하루 빨리 냄비를 두드려 적이 아닌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적으로 오해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흑백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서 나온다.

다양한 의견 중에는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고 찬반과 관련 없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이 공존하며 토론하고 인식을 넓혀가는 가운데 사회
전체의 지식이 상승작용을 하여 축적되고 발전하여 가는 것이다.

냄비 두드리기 의식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때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국민의
지력이 상승하여 경제에 대한 성숙한 시각도 성립하게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