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이 방관과 양어머니의 싸움을 말리고 방관을 데려와 청문더러
계란비누로 방관의 머리를 감겨주도록 하였다.

청문이 투덜대며 방관의 머리를 감겨준 후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고
머리를 툴어올려 쪽을 져주었다.

해당화빛 저고리에 초록 명주 겹바지를 입고 있는 방관이 기름을 발라
윤기가 도는 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으니 다시 극중 인물이 된 것처럼
말끔한 용모가 되었다.

천애고아인 방관은 극단이 해체되면서 떠돌이 신세가 될 뻔하였으나
다행히 대관원에 남게 되었는데,방관의 양어머니는 자기가 주선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면서 생색을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방관의 덕분에 양어머니도 대관원에 빌붙어 먹고
살고 있는 셈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시녀들이 보옥에게 죽순으로 끓인 국을
내어놓았다.

보옥이 뜨거워 잘 먹지 못하고 있자 습인이 국을 입으로 불어주다말고
방관에게 그 일을 시켰다.

"이제 너도 도련님 시중드는 법을 배워야지. 국을 불 때는 말이야,
침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불어야 해"

방관이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신통하게 잘 해내었다.

방관이 입을 쫑끗 내밀고 후후 불고 있는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던 보옥이 습인과 청문 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저녁 먹으러 가지. 방관이는 남아 있고"

그리하여 방관과 둘이 남게 되자 보옥이 궁금해 하던 우관의 사연을
물어보았다.

"도대체 우관이 누구를 위해 소지를 하며 재를 올리는 거야? 방관이
너는 알고 있다며"

"죽은 동무를 위해 그러는 거예요. 약관이라고"

방관이 좀 식은 국을 보옥 앞으로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또 대단한 사연이 숨어 있다고? 동무를 그리는 우정으로 그러는
것이었군"

"우정 정도가 아니었어요.

우관은 연극을 할 때 주로 남자역을 맡고 약관은 여자역을 맡아
부부간이 자주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정말 부부간인 것처럼 둘은 뜨겁게 사랑을 속삭였어요.

극중에서도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실연을 한셈이죠.

다른 배우들이 눈을 뜨고 못 볼 정도였다니까요.

주위에서 둘을 말려보아도 막무가내였어요.

둘다 사랑에 눈이 멀었는데 누가 말려요.

그러다가 약관이 폐병으로 먼저 죽자 우관은 따라 죽을 것처럼 비통해
했어요"

보옥이 가만히 한숨을 쉬고 나서 방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관을 보며 내가 그러더라고 알려줘. 앞으로는 약관을 위해 아까운
종이돈을 태우지 말라고.

정성을 드리는 마음이 있으면 향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거야.

그래도 정 소지를 하고 싶다면 내가 종이주머니를 사주겠다고 하더라
그래"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