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인 1896년 8월29일은 우리나라근대사에서 최초의 임업에 관한
조약인 "한.러 삼림협약"이 체결된 날이다.

이 조약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조선의 자원침탈의 신호탄이 되고
급기야는 러.일 전쟁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등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은 다른 굵직한 사실들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임업연구원 (원장 최민휴)은 이날을 기념, 29일 "한국임업근대화과정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갖는다.

발표자인 이화여대 강영심교수와 고려대 정태헌교수, 임업연구원의
박경 (임금왕변 경) 석박사는 이같은 삼림침탈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삼림황폐화로 이어지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1895년말 을미사변과 1896년2월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실권을
잡은 러시아는 일제에 앞서 각종 이권침탈에 착수하게 된다.

블라디보스톡의 상인 이울리 이바노비치 브리너 (배우 율 브리너의
조부로 전해지고 있음)는 8월29일 (고종실록에는 9월8일) 외무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조병목과 한로삼림협동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최대의
삼림자원보고인 두만강상류우측 무산과 압록강, 울릉도의 국유림에
대한 벌목특허권을 따냈고 막대한 이익을 가져갈 수 있게 됐다.

이 이권은 나중에 러시아의 극동정책인 신노선정책과 결부돼 압록강
유역방어계획에 이용되게 된다.

이 정책의 주무자인 베라브라조프는 브리너의 벌목특허권을 인수하고
1903년들어 압록강 두만강유역경영에 본격착수한다.

벌목특허권과 삼림회사운영으로 극동지역에서 러시아세력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구상이었다.

일본과의 만주이권쟁탈에서 러시아의 독점권을 보호하고 세부적으로
압록강지역 방어정책과 만주방어를 위한 문호폐쇄정책을 취했다.

러시아는 백마산성에 진출하고 용암포에서 병참기지구축을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위협을 느낀 일본이 일청의성공사 등 민간기업을 통해 러시아의
삼림이권 확장에 대처하게 되고 러시아의 남진책의 일환인 용암포조차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용암포개방 의주개방문제를 제기하는 등 만한지역
전진정책을 저지에 나서자 러.일간 긴장이 고조됐다.

양국간의 교섭은 1904년초가지 계속됐으나 러시아가 국내사정으로
전쟁준비가 안돼있음을 감지한 일본이 2월10일 선전포고하면서 러.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세가 유리해진 일본은 5월18일 한국정부로 하여금 1896년 체결된
한러 삼림조약을 폐기하는 칙령을 발포케 하는데 러시아가 과거에 획득한
특허하동중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울릉도지역 삼림벌목 특허의 인준을
파기한다고 명시, 일제의 그 지역삼림벌목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입증하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6년 10월19일 압록강삼림개척을 위해
압록강.두만강삼림협동약관을 체결하고 1907년 3월 "한국삼림특별회계법"을
공포, 압록강 두만강연안 천연원생림의 삼림수탈을 입법화했다.

일본은 곧이어 칙령73호 "통감부 영림창관제"를 제정발포, 조선통감
직속기관인 통감부영림창을 신설함으로써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대대적인
삼림벌목수탈작업이 본궤도에 오르게된다.

양대강유역의 삼림벌목은 통감부의 특별회계로 편입돼 일제가 모든
수익을 독점했으며 합방이후 총독부재정과 제지회사 민간채벌업자 등
일인민간업자들을 살찌우게 된다.

한러삼림조약이후 백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우리기업이 러시아에서
벌목을 하는 처지로 바뀌게 됐다.

한편 박박사는 "한국임업이 열강들에 의한 자원수탈과 전쟁에 의한
산림파괴로 막대한 자본손실을 입었으며 수십년에 걸쳐 많은 노력과 땀을
쏟아 겨우 과거의 임목축적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면서 한국임업의
산업화를 통해 대가를 회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채자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