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가 조선조 세종23년 (1441)에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설이 된지 이미 오래다.

이탈리아의 1639년, 프랑스의 1658년, 영국의 1677년보다 200년 안팎
앞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한 것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12년에 "서운관에 대를 만들고 길이 2척, 지름
8치의 철기를 주조하여 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그 깊이를 잿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것에 측우기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다음해였다.

그 아이디어의 제공자는 뒷날 문종이 된 당시의 세자였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와 중국의 몇몇 학자들은 측우기가 자기네 나라에서
처음 발명되었고 또 자기네가 만든 측우기가 한국에 건너 갔다는 강변을
하고 있는가하면 그에 가세하는 외국의 학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중국학자들은 1424년 명나라때에 만들어진 원측형 또 항아리형의
천지분으로 우량을 잿다는 기록을 들어 측우기가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는 주장을 해 왔다.

그러나 원측형이나 항아리형의 용기로는 강우량을 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다 청나라 초기의 "청우일록"에도 강우량을 잿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중국에는 당시에 측우기가 없었음을 알수 있다.

또한 중국제 측우기가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그들의 주장 또한 그
근거를 찾아 볼수 없다.

현재 대구와 인천에 담아 있는 영조때 (1770)의 황동 측우기의 발침대에
"건륭"이라는 청나라 고종의 연호가 씌어 있다는게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유일한 근거다.

그러나 중국의 연호는 조선백자나 종을 명문을 비롯해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었고 또 중국에는 그러한 명문이 새겨진 측우기가 한개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그들의 주장을 뒤엎는 논리가 된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 한국이
중국문화권이라는 문화대국주의적 생각에 사로 잡혀온 중국인들이고
보면 그러한 견강부회식 주장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한 한민족의 문화적 창의성을 왕각한 아집의 소산일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신문 주최로 26~31일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제8회
국제동아시아 과학사대회에서는 이 문제가 공식 제기되어 참가
외국학자들로부터 "측우기 발명의 시원지는 한국"이라는 공감을 도출해 내
관심을 끌었다.

한국을 중국의 하위문화권쯤으로 생각하는 외국 학계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 잡아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