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가야 하리
갈대밭 가을의 햇볕 속으로
살붙이 식구들의 애잔한 고통 속으로
오래 기다린다는 것은
눈물의 세월을 버티며 사는 것

돌아가 한 송이 수선화를 심어야 하리
두레가 무너진 마을에
아랫집 무너진 담장 밑에
다정했던 벗들의 잃어버린 꿈속에
더 늦기 전에

어쩌면 나는 사랑이 부족한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눈물이 부족한지도 몰라
비상하던 새의 저녁처럼
가야 하리 헛된 욕심 따위는 버리고
왜가리가 한가로이 먹이를 잡는 강변으로
이른 새벽 홀로 깨어 장을 담는
어머니의 갈라진 손등을 잡으러
말없이 세월을 이긴
벗들의 살림 속으로
나 돌아가야 하리.

시집 "저물 무렵"에서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