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국제동아시아과학사회의가 지난 31일 1주일간의 공식 일정을 마쳤다.

이번 서울회의는 우리나라를 포함, 세계 15개국의 과학사학자 200여명이
참석해 122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어느 대회보다도 성황리에 치러졌다.

다음 회의는 유럽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번 회의는 21세기를 선도할 동아시아지역 국가의 과학기술전통에 관한
이해는 물론 서양에서 유래한 현대과학기술과의 관계, 그리고 현대에 있어
동아시아 과학기술전통의 의의및 역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과학기술사에 있어서 "겨레과학"의 참다운 위치를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겨레과학의 참모습은 그동안 크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독창적 과학기술산물이 중국것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은 우리나라로부터의 영향을 아예 무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동아시아과학사연구가 구미및 중국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탓이다.

그러나 외국인 참가자들은 이번 회의에서 발표된 한국관련 논문과 1~2일
이틀간 공주 부여 경주등 우리나라의 주요문화유적지를 둘러보는 과정에서
종전의 시각을 상당히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박성래교수가 회의 첫날 발표한 "동아시아과학사서술에서의 자랑과
편견"이란 제목의 논문에 대해 참가자들이 박수로 화답한 것에서도 뒷받침
되고 있다.

박교수는 세종때 만든 측우기가 어느 순간 중국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들의 역사적 사실 왜곡에서 비롯됐다고 주장,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라니경이 우리고유의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참가자들의 반응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이번 회의는 우리나라 과학사연구의 초라한 현주소도 그대로 보여
줬다.

우리나라의 과학사관련 연구인력은 대학교 전임강사급 이상이 30명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중국은 과학원내 자연과학사연구 전문인력만 20명이며 전임
연구원까지 합치면 100명을 넘는다.

일본역시 수백명을 웃돈다.

과학사관련 영문저술출판활동 역시 빈약하기 그지 없다.

우리나라의 과학사관련 영문저서는 전상운박사가 지난 74년 미 MIT대
출판사를 통해 낸 "한국과학기술사"가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다.

중국이 대학에 "과학번역과"까지 두고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영문번역해
내놓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겨레과학에 대한 영문저서가 없으니 외국인학자들이 중국 일본학자들이
펴낸 영문서적의 시각을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고유의 과학기술산물이 외국것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국내
과학사연구진의 책임이 크다.

따라서 서울회의를 계기로 연구기반확충및 영문저서출간이 보다 활성화돼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강화돼야할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전상운박사가 "당장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전통과학기술을
등한시해서는 안될 것"이라며 "문화외교 강화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 김재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