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겨울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 30번가에 몰아치던 바람은 유난히
매서웠다.

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이 "Rent(임대)" 사인만 간간이 눈에 띄는
스산하기만 한 거리를 한 이방인 사내가 걷고 있었다.

나이 서른다섯.

국적 한국.

미국에 갓 이민온 그는 자신의 전부를 걸어 이 곳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사무실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그로부터 24년.

이 사내는 지금 JANSPORTS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가방회사의 사장이
돼 있다.

스산하기만 했던 브로드웨이 30번가도 맨해튼에서 손꼽히는 번화가로
변모했다.

30번가는 가방 잡화 보석 모자 등을 취급하는 한국인 도매상이 밀집해
있는 곳.

뉴욕 당국이 한인무역가(Korea Trading Ave.)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정도로 이 거리에는 한국인 교포상들이 많다.

최희용사장(59).

나이 서른다섯에 브로드웨이에 사무실을 낸 그가 30번가를 한인 상가로
변모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여기에 처음으로 가발판매회사를 세워 수많은 한국인 가발패들러들로
하여금 이를 판매하게 했다.

가발사업의 성공은 한국인 상인들을 불러들였고 이것이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번영에 불을 지핀 기폭제가 됐다.

최사장은 가발판매로 얻은 자본과 경험을 바탕으로 "NAS"라는 자체브랜드의
가방 판매사업에 뛰어들었다.

충청도 산골에서 태어난 최사장이 미국에 온 건 지난 69년이었다.

한국에선 한국관광공사에서 일했었다.

외국인을 상대하는 일이 많아 영어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근면 검소한 생활을 해와 큰 부담없이 도미를 결정할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국은 이국이었다.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의 생활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모아 처음 시작한 사업이 가발판매업.

친구와 함께 맨해튼 뒷골목 싸구려 사무실을 빌려 "KOREA PRODUCT COMPANY"
라는 회사를 세웠다.

가발은 당시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미국시장에 첫 선을 보인 한국의
대표적 수출상품중 하나였다.

마침 그 인기는 대단해서 비즈니스맨들 사이에서는 가발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릴 정도였다.

"밥먹을 시간"도 없을만큼 가발사업은 번창했다고 최사장은 설명한다.

이 가발판매에 발벗고 나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

하지만 "돈이 되는" 일에는 사람이 몰리게 마련.

최사장의 성공은 한인교포들의 가발판매점 개설을 촉발했다.

특히 한국업체들이 직수출에 나서면서부터 장사는 시원찮아졌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사업을 물색한다.

그게 바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가방판매업이다.

사업전환 후 그가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자체상표 개발이었다.

고유브랜드를 개발해야 제품 차별화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단순히 가격경쟁력만 믿고 도매업을 했다면 가발업에서처럼 어려움을
겪었겠지요"

최사장은 "같은 제품이라도 내 상표를 붙여 파는 것이 훨씬 유리하고
안정적일 것"이라는 판단아래 "NAS"라는 상표를 개발한다.

NAS는 "NATIONAL ASIA SURPRISE"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지금이야 고유상표 개발이 보편화됐지만 그의 발상은 당시만 해도 "뚱딴지"
같은 것이었다.

주변에선 "쓸데없는 짓"이라는 비아냥도 들렸다.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미국인 변호사를 통해 상표등록을 마치고 "나스 수입상사
(NAS IMPORT CO.)"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한국산 가방은 품질과 가격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침 새로 개발돼 공급하기 시작한 PVC원료의 인조가죽가방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는 바람에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최사장은 미국의 지역별 거점시장 개척을 위해 전국 곳곳의 전시회나
소매상들을 찾아다니며 거래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번 거래를 시작한 고객은 이유없이 그와의 거래를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그의 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 정신이 한번 거래를 시작한
이들을 평생고객으로 만든 것이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고객이 많습니다"

비즈니스의 성패가 브랜드 개발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핸드백 등 유행에 민감한 제품은 우수한 디자인의 개발이 필수적이다.

미국 전역과 중남미 등에 수많은 바이어들을 확보하게 된 NAS사 최사장은
이들과 대화를 할 땐 꼭 메모하는 습관을 들였다.

수시로 방문하거나 찾아오는 이들 바이어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당시의 유행이나 고객의 요구를 반영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디어들이 신제품 디자인에 반영되어 히트상품으로 연결되곤 했다.

현지 비즈니스의 번영은 곧 한국상품의 미국시장 확대로 연결된다.

NAS사는 해마다 3,000만~4,000만달러어치의 한국산 가방을 수입해 수출한국
의 선도자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는 셈이다.

최사장은 지금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각종 훈장과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브랜드이미지는 고객의 품질 만족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NAS브랜드가 좋은 이미지로 인식되자 상품도 쉽게 팔 수 있었으며 동시에
NAS의 한국상품이 좋은 반응을 보이면서 브랜드 이미지는 더욱 제고되었다.

이제는 학생가방 등에서 미국 현지의 JANSPORTS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는 간접적으로 한국 상품의 우수성을 소비자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최사장의 사업이 항상 순탄한 길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다.

특히 어려웠던 경우는 80년대 중반이후 한국산 가방류의 값이 폭등했던
때다.

그동안 한국 상품만을 취급하며 자부심을 느껴온 최사장이었지만 국내
인건비 상승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원가부담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브랜드 이미지를 생각해 거래를 계속하던 고객들도 계속되는 가격상승에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부득이 한국내 공장의 시설 일부를 중국으로 옮겨 저가제품을 공급케 하고
국내 공장은 디자인및 신제품 개발과 일부 고가품 생산을 담당케 하는
이원체제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더이상 기존 고객이 이탈하지 않고 브랜드 이미지도 더욱
개선할 수 있었다.

최사장은 교포 및 현지 경제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그는 브로드웨이 교포경제인들의 집합체인 "뉴욕 한인경제인협회" 창설멤버
로 제3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회장이던 지난 80년 8월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광복절 기념행사를
가져 우리 교포의 단합된 모습을 미국 전역에 과시했다.

소수민족으로서 한인사회 실상을 알리기 위해 현지 경제계 인사는 물론
주요 정치지도자의 후원활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지난 91년 미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인 스테판 솔라즈의원을
초청해 간담회를 개최하고 후원금을 모금해 주었다.

현 뉴욕시장인 루돌프 길리아니가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하자 89년부터
정치자금 모금활동을 벌여 그가 94년 시장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
교포경제인과 2세들의 정치역량 향상에도 기여했다.

또 뉴욕 주립 스토니브룩대에 한국어과정을 설치하기 위한 총장 자문위원
으로 선임돼 학교당국과 교포사회간 긴밀한 협조체제를 다지는데도 힘쓰고
있다.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최사장은 성실성과 완벽한 신용으로 이름이 높다.

지난 70년대 초부터 그와 거래관계를 맺고 있는 케미컬뱅크 브로드웨이
지점장 루이스 넌치아타씨는 "내가 20년 이상 거래한 몇몇 비즈니스맨들
중에서 최고의 신용을 지닌 이는 단연 최사장"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교포중엔 돈을 좀 벌면 지위 상승을 과시라도 하듯 고급 승용차를 사고
대저택을 장만하는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최사장은 비즈니스 이외의 그런 일에는 한눈을 팔지 않는다.

지금도 수입제품의 포장박스를 하나하나 모아두었다가 이를 처분할 정도로
성실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경영모토는 "서두르지 말자" "신용을 지키자" "정직하자" "성실하자"
등 네가지.

이를 신조로 생활하며 뉴욕에 한국을 알려온 최사장은 국내 누구보다도
한국의 이름을 빛낸 한국인임에 틀림없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