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버틸만 한데도 나가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국내기업환경이 외국의 평균수준만 되면 나가라고 몰아대도 안나가고
버틸 겁니다"

지난달 29일 이석채 청와대경제수석을 만나고 돌아온 모 그룹 기조실장의
말이다.

이 말에는 이수석이 기업들에 대해 해외투자 자제를 요청한데 대한
재계의 반응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한마디로 정부에서 말리더라도 해외투자는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같으면 정부쪽에서 이런 의사를 내비칠 경우 앞다투어 해외투자계획을
조정하는 등 부산을 떠는게 국내기업들의 관행이었다.

이수석도 요즘이 한창 내년도 사업계획의 골격을 짜는 시기라는 점을
감안해 즉각적인 재계의 반응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번엔 의외다 싶을 만큼 재계로부터 별 반응이 없다.

별 반응이 없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기왕에 추진해온 해외투자
프로젝트를 계획대로 밀어부친다는 방침을 굳히고 있다.

미국 유럽 등에 투자진출방침을 밝혔던 한 반도체업체의 경우 "당초
방침에 아무 변화가 없으며 이미 구체적인 투자계획이 확정단계"라고
밝히고 있다.

또 국내의 상용차시설을 해외에 이전키로 했던 모 자동차업체도
"국내시설은 이미 포화상태여서 당초 계획대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재계가 이처럼 정부의 요청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의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가 좀체 개선되지 않고 있어서다.

S그룹의 한 관계자는 우리기업들이 떠안고 있는 고비용구조의 현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물가상승율을 감안한 국내실질금리는 연8.1%에 이르고 있다.

이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2-4배 수준이고 대만 싱가포르 등
경쟁국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땅값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본과 홍콩을 제외하고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의 공장부지가격이
국내 공단가격에 비해 10-20배나 저렴한 실정이다.

투자만 하면 땅을 거저주는 나라도 있다" 그의 설명은 이어진다.

"물류비용도 문제다.

국내기업들의 매출액대비 물류비부담은 14.3%로 일본이나 미국의
2배수준이다.

노동비용 역시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최고수준이어서 노동집약적
산업은 물론이고 자본집약적 산업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처럼 금리 지대 임금 물류비 등 기업의 원가요소가 모두 기업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으니 "살아남으려면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특히 이같은 고비용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정부의 규제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금리는 말할 것도 없고 땅값만 해도 정부가 토지이용규제만 풀면
얼마든지 내릴 수 있다.

인건비도 시간제 고용 임시직 고용 등에 대한 정부의 규제 때문에
더욱 비싸지고 있다."는 것이다.

D그룹의 기조실장은 이에대해 "기업은 어차피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다.

기업을 국내에 붙잡아 두려면 우선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주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재계에서는 또 "산업공동화"우려를 앞세운 정부의 해외투자 자제요청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회의도 제기한다.

"막연히 산업공동화 산업공동화 하며 걱정하지만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개념정리가 안돼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해외투자가 산업공동화를 야기한다는 논리는 좀더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관련 H그룹관계자는 "선진국에서 산업공동화를 문제시하는 것은
그것이 고용감소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인력난을 겪고 있고 인건비는 갈수록 올라만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공동화를 염려해 해외투자를 말린다는 것은 넌센스다"
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정부가 기업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흘러간 개발경제시대 때의 일"이라며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선 지금 정부가 개별기업의 투자행위까지 코치하려 드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임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