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공급제의 한계 ]

"부장님 다음번 인사때는 xx부로 가고 싶습니다. 꼭 좀 보내주십시오"

S상사 전자부 미국과를 맡고 있는 박과장은 얼마전 인사부장에게 이렇게
청탁했다.

이 회사에서 미국과장은 잘 나가는 사람이면 반드시 거치도록 돼 있는
"노른자위 코스".

반면 박과장이 지원한 xx부는 한직중의 한직 부서다.

미국과장을 그만두고자 하는 박과장의 변은 이렇다.

"일벌레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열심히 일했지만 몸만 축났습니다. 쉬엄쉬엄
농땡이쳐가면서 해도 똑같은 월급을 받기는 마찬가진데"

박과장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회사원치고 "한직 선호증후군"을 앓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회사원을 한직으로 내몬 것은 다름아닌 연공급제도이고 대부분 기업들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공제는 일한 햇수를 기준으로 임금을 주는 연공서열급의 준말.

한날 회사에 들어온 입사동기면 무조건 동일임금으로 가는게 원칙이다.

말하자면 일을 열심히 하든 안하든,힘든 일을 하든 쉬운 일을 골라 하든
월급봉투에 찍히는 숫자는 똑같은 "임금 무임승차" 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기업중 88.5%가 연공서열을 중심으로 임금을
정하고 있다"(노동연구원조사)고 하니 대충 우리나라 회사원 10명중 9명은
무임승차를 일단 즐기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대부분 국내기업의 임금시스템이 저효율구조로 돼 있는 상황에선
생산성향상을 아무리 외쳐봤자 "허공의 메아리"가 될게 뻔하다.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공급은 저효율에 한술 더 떠 회사의 임금총액을 늘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임금을 1%만 올린다 해도 전체 인건비는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노사 협상이 잘 안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연공급에 기인한다.

근로자 입장에서 보면 임금 인상률이 너무 낮고 회사쪽에서 보면 임금총액
이 너무 많아지니 임협때면 노사가 늘 티격태격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연공급제는 단지 기업측에만 부담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근로자들도 피해를 본다.

최근 들어 유행하는 명예퇴직제에서 보듯 "연공서열식 임금체계의 폐해는
결국 근로자 자신에게 돌아올게 분명하다"(LG정보통신 박기성인사부장).

고임금의 폐해뿐만 아니라 연공급제는 시대상황에도 뒤떨어진 제도다.

연공급제는 사실 조선 철강등 중후장대 산업에서 상품을 양산하던 시절에
맞는 제도였다.

이같은 산업은 장기근속 숙련노동자의 손에 의해 품질이 정해진다.

근무연한이 오래된 숙련 노동자가 필요했던 만큼 임금체계가 연공서열순
으로 되는건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각 산업부문에서 자동화가 확산되고 있음은 물론 정보화 소프트화로 치닫고
있다.

또 경영시스템 자체도 지금은 자국 중심 경영과는 거리가 멀다.

글로벌경영이 대세가 돼가고 있다.

글로벌경영하에서의 인적자원은 자국인에 한하지 않는다.

기업들은 유능한 외국인도 고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 외국인에게 연공서열급여를 설명한다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평생직장"이라는 연공급제의 출발동기도 더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평생직장이란 종업원들이 늙어서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생활을 보장해 주는
회사란 뜻이다.

그래서 햇수를 기준으로 월급을 주는 연공급제는 평생직장을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어느 국가건 산업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연공급제는 더이상 평생
직장을 실현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H전자 L이사).

안정기에 들어가면 산업저변이 두터워짐에 따라 경쟁이 심화되는 탓이다.

극심한 경쟁체제 하에서 연공급제로 평생직장을 고집하다 회사가 문을
닫는다면 그런 평생직장은 구두선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연공급제가 이렇게 한계에 부닥쳐 있다는 것은 이 제도를 일본식 경영의
진수라며 세계에 자랑하던 일본의 기업들이 "연공제 파괴"에 나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동기유발형 보상체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임금에 대한 그 어떤 접근도
"구름위의 헛소리"에 불과하다"(김영배 경총 정책본부장)는 지적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정리=조주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