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생각해도 돌이켜 보면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들어가 심연을 알 수 없는 성취와 성공이란
단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뛰어온 셈이다.

아마도 지금 내 나이 때 대부분 사람들의 지나온 삶의 모습이 이러할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 속에서 한가닥 낭만과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곳에는 "바쁨"과 "정신없음" 따위는 머무를 수가 없다.

그곳에는 마치 푸근한 고향만이 있을 뿐이다.

그 고향을 얘기하자면 아스라한 기억 저편,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 2월, 부산 고등학교를 졸업한 24회 동기 8명 (필자 포함)은
대학시험에 실패, 서울에서 재수를 하며 재기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오직 대학입학이란 목적만을 위해 자신과의 투쟁(?)을 하고 있던
우리들은 그해 가을 결국 객지의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무교동 카페에서
흑맥주, 아마도 흑맥주가 국내에 처음 소개 되었을 무렵일 것이다.

어쨌든 흑맥주를 앞에 놓고 우리는 서로에게 약속을 하였다.

죽을 때까지 우정이 변치말자고....

그때 모임 명칭을 두고 우리들은 고심했다.

"그중 한 친구가 우리 교가 가사중의 "아스라히"라는 단어의 뜻이
"멀리"라고 하니 영원히 우정이 변치 말자는 우리 모임의 취지와 같지
않느냐"하는 말에 우리들은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그후 한달에 한번 정도 만나 향수를 달래던 우리들의 모임 소식을
듣고 같이 재수하고 있던 경남 고등학교 출신 친구 2명이 자신들도
가입하겠다며 생떼를 쓰는 통에 우리들은 "라이벌 학교 출신은 받을 수
없다"아니다 "부산에서는 라이벌이었을 망정 객지인 서울에서는 다같은
동지(?)다"라는 논란 속에 라이벌 보다는 동지 쪽의 의견이 우세해
우리들은 10명이 되었다.

또한 회장도 매년 순번제로 돌아가며 하기로 정했다.

그해 겨울, 우리들은 서울대에 6명, 외국어대에 2명으로 회원중 8명이
합격하고 2명은 고난의 삼수생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그 이듬해 나머지 2명도 서울대에 무난히 합류하였다.

이로써 "아스람"회원 10명은 전원은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아스람" 모임도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그 긴세월 동안 우리는 늘 함꼐 해왔다.

어려울 때는 서로돕고 잘 되었을 때는 서로 축하하며 그렇게 삶을
나누어 왔다.

지난 86년도에는 부부동반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집안 사람들끼리 더 친해져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부부동반하여 만나는 모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허택 (부산에서 치과병원 운영중), 이대현 (부산 한얼 출판사 대표),
임병구 (한성생명 부장), 박무흡 (한국 네슬레 마산지점장) 등이 부산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조흥식 (현 회장, 서울대 교수), 이창명 (동부화학
부장), 장재화 (상지대 교수), 김진호 (김진호 치과병원 원장) 그리고
필자가 서울에서 사는 연고로 요즘의 "아스람"의 정기적인 모임은
서울에서 한번, 부산에서 한번하여 연간 2번 만난다. (박재민이란 친구는
88년도에 해외 이민)

이제 삶의 여유도 생기고 "아스람" 모임도 연륜이 쌓여 사회봉사
활동이나 지금까지 적립된 회비를 활용하여 장학금 제도도 마련해 볼
작정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