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분별이 생겨 혼인에 대해 책임을 질 거라고?

사리분별이 생기면 그만큼 낙심과 슬픔도 커져 자살 같은 것을
기도할 수도 있지 않느냐?"

왕부인의 말도 일 리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희봉으로서는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척되었는데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가지고 미리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해보았자 소용이 없는 일이지요.

분명한 것은 보옥 도련님이 보채와 혼인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 혼인을
치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어떡해서든지 혼인은 치러놓고 봐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재안한 방법 이외에 다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닥치는 일들은 그때그때 수습을 해나가면 길이 열리겠지요"

하긴 희봉의 묘책 외에는 별 뾰족한 수도 없는 것 같았다.

대부인과 왕부인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동시에 희봉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두 사람의 눈길에는 만약 일이 잘못 되어 나쁜 결과가 있게 되면
책임을 지라는 경고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 희봉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한번 움찔하였다.

어쩌면 이 일로 인하여 몇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할지도 몰랐다.

여러 사람이 죽느니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희봉은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희봉이 말 대로 일을 일단 추진해 나가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겠어.

먼저 신방부터 꾸며놓도록 하지"

대부인은 이제 결심이 섰는지 희봉의 남편 가련을 불러 보옥이 보채와
혼인을 하게 된 사실을 은밀히 알려주면서 소문을 내지 않도록 당부한 후
보옥의 신방을 꾸미도록 하였다.

가련은 하인들과 시녀들을 데리고 대부인의 별채 한 방을 새로
도배하고 침상과 가재도구를 새것들로 들여놓았다.

시녀들 사이에서는 보옥이 보채와 혼인을 한다, 대옥과 혼인을 한다
하며 말씨름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흘이 지난 후에는 다른 하인과 시녀들은 보옥의 혼인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물게 되었고,보옥을 모시는 시녀들만이 희봉이
시킨 대로 보옥 주위에서 보옥이 대옥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수시로 수군거렸다.

처음에는 보옥이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별 관심이 없다가
보옥이라는 자기 이름과 대옥이라는 이름이 자주 들먹거려지자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보옥 자신의 혼인에 대하여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지 않은가.

보옥은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멍해지곤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