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김대건 순교 1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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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 선교사의
전도없이 학자들이 자발적인 연구로 창립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선조 영조말 당시 정권에서 물러난 이벽 권일신 이가환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의 유력인사들이 천주학을 연구하다 신앙을 갖게
됐다.
그리고 1783년 (정조7)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다음해 귀국했다.
당시 조정에선 당재이 계속돼 남인들은 영달의 길이 막혀 염세적
관념이 깊었고 젊은 학자들은 주자학에 염증을 느꼈으며 중인계급도
사회의 폐단을 통감하고 있어 천주교 세력은 점점 퍼져나갔다.
정조는 비교적 천주교 탄압을 삼갔었으나 조정에선 천주교가 충효사상에
반한다며 박해가 시작됐다.
특히 신유박해 (신유사옥)는 벽파가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821~1846)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다.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에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재를 따라 마카오에
있는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써다.
그는 1844년 고국 교회의 참상을 듣고 갖은 고난끝에 귀국했다.
그는 위축된 교새재건에 매진했고 선교사를 영접키 위해 5개월후
또 작은 배로 황해를 건너 상해로 갔다.
선교사들은 그의 용감한 활동에 감복해 1845년8월17일 그를 사제로
서품했다.
그는 그해 9월 페레올, 다블뤼 두신부와 같이 황해를 건너 다시 입국해
전교에 전력했다.
그러나 김신부는 마침내 1846년 등산진에서 포졸에게 체포돼 9월16일
새남터 (노량진 사장)에서 참수, 당해 순교했다.
그의 나이 겨우 25세였다.
그후 김대건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오는 15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김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갖는다.
이 신앙대회는 가톨릭의 토착화란 관점에서 우리 문화와의 접액을
시도한다.
우선 이 대회의 제단은 우리 전통적 등잔 내지 갓 모양을 하고 있고
사전 행사에선 사물놀이패가 등자하며 김신부 일생을 다룬 국악관 현악과
무용이 공연된다.
또 미사중의 성가는 모두 우리 가락으로 돼있다.
이같은 시도는 가톨릭의 토착화를 위해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전례의 토착화는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해선
내용의 토착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4일자).
전도없이 학자들이 자발적인 연구로 창립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선조 영조말 당시 정권에서 물러난 이벽 권일신 이가환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의 유력인사들이 천주학을 연구하다 신앙을 갖게
됐다.
그리고 1783년 (정조7)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다음해 귀국했다.
당시 조정에선 당재이 계속돼 남인들은 영달의 길이 막혀 염세적
관념이 깊었고 젊은 학자들은 주자학에 염증을 느꼈으며 중인계급도
사회의 폐단을 통감하고 있어 천주교 세력은 점점 퍼져나갔다.
정조는 비교적 천주교 탄압을 삼갔었으나 조정에선 천주교가 충효사상에
반한다며 박해가 시작됐다.
특히 신유박해 (신유사옥)는 벽파가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821~1846)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다.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에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재를 따라 마카오에
있는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써다.
그는 1844년 고국 교회의 참상을 듣고 갖은 고난끝에 귀국했다.
그는 위축된 교새재건에 매진했고 선교사를 영접키 위해 5개월후
또 작은 배로 황해를 건너 상해로 갔다.
선교사들은 그의 용감한 활동에 감복해 1845년8월17일 그를 사제로
서품했다.
그는 그해 9월 페레올, 다블뤼 두신부와 같이 황해를 건너 다시 입국해
전교에 전력했다.
그러나 김신부는 마침내 1846년 등산진에서 포졸에게 체포돼 9월16일
새남터 (노량진 사장)에서 참수, 당해 순교했다.
그의 나이 겨우 25세였다.
그후 김대건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오는 15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김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갖는다.
이 신앙대회는 가톨릭의 토착화란 관점에서 우리 문화와의 접액을
시도한다.
우선 이 대회의 제단은 우리 전통적 등잔 내지 갓 모양을 하고 있고
사전 행사에선 사물놀이패가 등자하며 김신부 일생을 다룬 국악관 현악과
무용이 공연된다.
또 미사중의 성가는 모두 우리 가락으로 돼있다.
이같은 시도는 가톨릭의 토착화를 위해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전례의 토착화는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해선
내용의 토착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