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기기 개발생산업체인 팬택의 대표이사 박병엽씨(34).

지금은 연간 매출액 600억원을 바라보는 꽤 "잘 나가는" 중견기업체의
사장인 그이지만 불과 5년전만 해도 평범한 직장(맥슨전자)의 보통
샐러리맨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 스물아홉인 지난 91년 그는 홀연히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테스트하고 싶었던 것.

그저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주어지는 일만 하는 피동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살기에는 그의 젊은 혈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정보통신쪽이 유망할 것으로 판단한 박사장은 무선호출기(페이저) 제조업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이리저리 주위에서 융통한 자본금 6,000만원과 여직원까지 포함한 4명의
직원이 당시 그가 가진 전부였다.

막강한 자본력과 인적자원을 가진 대규모 전자업체를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선 신기술개발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기술개발에도 역시 중요한 건 자금이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정보통신부(당시 체신부)가 국책연구과제로 문자호출기 프로젝트에
참여할 업체를 뽑는다는 공고가 난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당시로는 적지 않은 4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었다.

밤을 새워가며 박사장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결국 삼성 금성(현 LG) 동양정밀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을 제치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냈다.

팬택의 웅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땐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각오로 덤볐습니다.

꼭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기보다 뭔가 한번 내손으로 멋진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죠"

어렵사리 기반을 다진 팬택은 국내시장보다 세계시장쪽으로 판매타깃을
잡았다.

특히 앞으로 잠재구매력이 무한한 동남아시장이 그의 주목표였다.

그러나 동남아는 홍콩 싱가포르 대만업체들이 이미 상당수 포진을 완료한
곳이었다.

팬택이 이 시장을 뚫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기술력에 기반을 둔 신제품
개발밖에 없었다.

박사장은 팬택의 자체 반도체기술로 개발한 문자호출기로 이 시장을
두드렸다.

그때가 93년 하반기.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이 제품은 동남아에서 날개돋친듯 팔리기 시작했다.

현재 팬택의 문자호출기는 홍콩과 싱가포르등지에서도 30%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팬택은 이익의 대부분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통 매출액의 15%는 이 부문에 쏟아붓는다.

세계 최소형 무선호출기개발(93년), 국내최초 음성무선호출기및 한글 영문
중문자표시 무선호출기개발과 같은 괄목할만한 성과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특히 최근에는 기존 제품에 비해 전송속도가 5배이상 빠르고 문자전송뿐
아니라 생활정보 그래픽 화상처리 쌍방향통신까지 가능한 최첨단 6,400bps
(초당전송속도)급 고속 무선호출기를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물론 박사장에게도 어려운 순간이 많았다.

92년 중국시장조사를 위해 현지출장을 갈때는 여비가 없어 신용카드 6개를
만들어 현금서비스를 받아가며 다녀왔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자금대출을 위해 산업은행을 찾아갔지만 보증이 없으면 대출이 불가능
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길로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 뛰어갔지만 역시 뚜렷한 매출실적도 없는
회사에 보증을 서줄리 만무했다.

다른 대안이 없다고 본 박사장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보증기금으로
출근을 했다.

처음엔 만나주지도 않던 지점장도 한두번도 아니고 열흘이 지나도록
매달리자 직접 당신회사를 방문하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박사장이 앞으로의 계획을 3~4시간에 걸쳐 설명하자 지점장은 "당신
같은 열정이라면 내가 목이 날아가더라도 대출보증을 서 주겠다"며 결국
OK사인을 내주었다.

"기왕에 할일은 잘하고 기왕에 살려면 멋있게 살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박사장은 정말 멋진 기업을 일구어 볼테니 지켜봐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