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시티은행에 근무하던 사무보조원 Y씨는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Y씨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금융기관에서 파견 근무하던 사무보조원
50여명도 "날벼락"을 맞았다.

이 사건은 평소 시티은행노조측이 서울지방노동청과 서울지검에 고발장을
접수하면서 시작됐다.

서울노동청은 고발장을 접수하고 즉각 해당 금융기관에 파견 사무보조원
들을 모두 해고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이유는 한가지 현행법규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된 현행법규는 직업안정법 33조.

이 조항은 "노동조합을 제외하곤 국내근로자 공급사업을 할 수 없다"고
돼 있다.

그러나 현행법규에 대한 은행주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자료정리 전산입력 전화안내 등 단순업무를 정규직원에게 맡기는 것은
인력낭비다.

정규직원 한사람 월급으로 두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데 도대체 파견
직원을 못쓰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C은행 K상무)는 반응이다.

또 다른 금융기관의 인사담당임원 P씨는 말도 마찬가지다.

"핵심부서인력은 정규직사원으로 정예화하고 지원인력은 계약직 파견
사원으로 충당하는 것이 인력활용의 "기본"이다.

이렇게 해야만 그나마 고임금을 해소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들어 그런 법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은행뿐 아니라 유통, 심지어 제조업에서까지 파견근로자들 활용을 크게
확대하고 있는게 그 단적인 예이다.

기업쪽에서 보면 정규사원에 비해 인건비는 물론 신규채용과 교육에
들어가는 관리비를 줄일 수 있어 좋고, 파견근로자의 입장에서도 취업이
쉽다는 이점이 있다.

그결과 생산직과 사무직 용역근로자들을 공급하는 인력파견업체도 대거
늘어나고 있다.

1천5백여개 업체가 연간 15만여명을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 될
정도다.

수많은 회사들이 직업안정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얘기다.

직업안정법 33조가 이미 사문화 돼 있다는 것은 주무부처인 노동부에서도
잘 알고 있다.

"파견근로는 사실상 방치돼 있다.

법 위반 사실이 접수되면 마지못해 조치를 취하지만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고 있다" (노동부 전진희 고용정책과장)

노동부의 이같은 미온적 태도는 한마디로 법과 현실의 괴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노동부는 법과 현실을 맞춰놓기 위해 93년 10월 근로자파견제를
양성화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근로자파견사업의 적정한 운영 및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안"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시 제출된 법안은 "근로자의 단결권을 약화시킨다"는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통과되지 못했다.

그뒤 3년 동안 이제나 저제나 통과를 기다렸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렇다고 파견근로제를 금지하자는 노동계의 주장이 근로자들에게 이득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파견근로자들을 속아내 자신들의 고용을 안정시키려는 기존 근로자들의
노력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명예퇴직 등 기업의 감원계획은 근로자들의 노력이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운전 경비 전화상담 포장 수송 우편물취급 등 단순업무에 파견근로자를
채용하면 인건비를 30%이상 줄일 수 있다.

이를 막아 놓으니 명예퇴직 등 감원수단이 총동원된다" (중견식품업체
L사대표).

근로자 파견 금지제도가 기존 근로자들을 "합법적으로" 감원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노동교육원 이정택 연구위원실장)는 주장이다.

근로자 파견제는 단순업무에서만 필요한게 아니다.

신산업의 등장, 그 자체가 근로자 파견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예컨대 정보통신 등 하이테크직종에선 파견근로자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다.

정보통신업체인 S사, D사, L사 등은 당국의 "묵인 아래" 키펀치 컴퓨터
문자편집 서무 등에 파견근로자들을 채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쯤돼자 불법으로 인력공급업을 해오던 I사의 양사장은 최근
"직업안정법 33조와 동시행령 33조2항이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평등권과
직업자유의 선택을 제한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 근로자파견제를 헌법적
판단의 도마위에 올려 놓았다.

양사장은 말한다.

"시대상황도 그렇지만 근로자 파견제도가 도입돼야 근로자 전체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고 고용도 안정시킬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구시대 법규에 의거한 인력수급체계를 개선하지 않고는
고비용도, 대량감원도 막을 수 없다"

< 정리 = 조일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