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18) 권병하 <말레이시아 HENIKWON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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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옹지마"
말레이시아의 전기 엔지니어링 및 무역업체 헤니권(HENIKWON)사 권병하
사장(48)의 지금까지 인생은 한마디로 이렇게 부를 수 있다.
지난 82년까지의 인생은 정치적 야망을 이루어보기 위해 사업을 소홀히
하다 부도를 내고만 실패작.
반면 쫓기듯 말레이시아에 흘러든 이후의 또 다른 인생은 그를 자랑스런
말레이-코리안으로 만들어준 성공중의 성공이었다.
한때의 실패가 오히려 더 큰 성공의 밑바탕이 된 것.
지금도 권사장은 문득 어려웠던 젊은 날을 생각하며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는 대학 졸업후 대기업 계열 종합상사의 촉망받는 상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넘치는 패기와 자신감만을 믿고 개인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업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던 80년대 초 혼미한 정국의 와중에서
정치인으로의 길을 꿈꾸게 됐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몰두하다 사업을 소홀히 한 끝에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알거지가 돼버린 그는 가족들을 시골 친척집에 맡긴채 단돈 1,800달러를
손에 들고 무작정 서울을 떠났다.
목적지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상사 근무시절 홍콩 호주를 거쳐 가끔 출장을 다닐 때 말레이시아의
생활비가 상당히 저렴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목적지로
삼았다.
권사장에게 말레이시아는 행운의 땅이었다.
82년은 말레이시아의 현 정권인 마하티르 정권이 탄생할 무렵이었는데
그 후부터 말레이시아는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권사장의 사업도 이에 많이 도움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처음 이곳에 도착한 권사장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KOTRA
무역관에서 제공해 준 바이어 리스트와 약간의 카탈로그, 여관 전화번호부
에서 찢은 광고면이 전부였다.
하루 1,500원의 최소경비로 살아가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마침 한국의 청계천격인 현지 전기제품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용접기 취급상과 상담을 하게 됐고 이들로부터 한국 "신흥공업사"의 용접기
노즐을 수주, 첫 거래를 성사시켰다.
현지 진출 두달만에 720달러의 거금(?)을 손에 쥐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
그러나 수출한 제품의 품질이 수준미달이었기 때문에 곧 바이어의 외면을
당하고 그는 다시한번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경험을 통해 한국 전기제품이 품질은 일본제품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격에서는 경쟁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전기제품을 취급하게 된 계기였다.
83년 권사장은 재력있는 친구 5명과 동업으로 회사를 정식으로 설립,
시장개척에 노력했다.
"금성계전"의 커넥터를 연간 60만달러까지 수입하는 등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사업을 너무 방만하게 확장한 데다 경기불황이 심화되었고 설상
가상으로 품질에 대한 클레임까지 겹쳐 결국 회사는 문을 닫았다.
84년 다시한번 그는 재기의 칼을 갈고 "HENIKWON사" 를 설립했다.
몇번에 걸친 실패 경험은 그에겐 좋은 약이 되었다.
그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서 말레이시아 구석구석을 버스를
타고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50여개 배전반 업체와 시험기관을 상대로 본격적인 세일즈 상담을
전개했다.
당시만 해도 현지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5만달러
이상의 주문을 내는 바이어들은 무조건 한국을 방문시켜 그들과의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수출 초기에는 영국 규격을 따르는 현지의 품질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제품으로 수없이 클레임을 당했다.
그러나 일일이 교체해 주거나 보상해 주는 등 정성을 다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로 한국에 대한 현지의 인식이
제고되면서 수출은 더욱 확대되었다.
권사장은 한국의 동명전기에서 생산되는 절전형 램프를 수입, 시장을
개척키로 하고 상징적으로 왕궁에 소요되는 물량 30개를 공급한 적이
있었다.
어느날 왕실식구가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중 천장에 설치된 절전형
전구가 떨어져 내린 적이 있었다.
전구의 캡이 60W의 열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 버려 무거운 안정기와 함께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우선 필립스사 제품으로 모두 교체해 주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었고 사후 처리가 신속해 수입허가가 취소되는
등의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현지 진출의 선두주자인 일본 기업들로부터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권사장의 노력으로 금성계전 제품이 현지 시장에 많이 진출되자 금성
계전의 일본측 주주인 후지사는 이 제품을 다루지 못하도록 갖은 압력을
집요하게 가해왔다.
그는 "후지가 현지에서 금성제품을 취급하고 있지 않으니 금성계전의
제품이 많이 팔리는 게 오히려 주주 입장에서는 득이 아닌가"하고 후지측을
설득했다.
수개월에 걸친 노력으로 금성계전 제품에 대한 해외 판권을 가지고 있던
후지사가 말레이시아 시장만은 HENIKWON에 양보하게 됐다.
현지인 직원 때문에 말썽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타 회사보다 월등한 대우를 받으며 5년간 근무해온 직원이 어느날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5만달러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잘 타일러 계속 근무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어 3만달러를 주고 사표를
수리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동유럽 시장조사차 헝가리에 출장 가있는 사이 갑자기
회사로부터 긴급연락이 왔다.
세관 특별수사대가 회사에 들이닥쳐 장부 등 일체의 서류를 갖고 갔다는
것이다.
영문을 모른 채 잔여 일정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얼마전 회사를 그만두고 돈을 요구하던 현지직원이었다.
이곳에서는 신고한 사람에게 벌금 부과액의 10%를 보상금으로 주는 제도가
있다.
그래서 보상금을 타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이다.
그는 관세를 적게 내기 위해 거래가격 이하로 신고한 적이 몇번 있었다.
결국 8년간의 서류를 샅샅이 뒤지면서 조사하는 세무담당자에게 벌금으로
3,300만원을 추징당해야 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말레이시아 세무공무원 중 한글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한글 서신내용이 다소 감춰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권사장은 이제는 거의 모든 한국산 전기제품을 취급하는 대형 수입상으로
정착했다.
연간으로는 600만달러 어치.
전기제품을 취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난 92년에는
말레이시아 주정부와 합작, 전주공장도 세워 300만달러 어치의 한국선
설비를 도입한 바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다른 전기 관련제품 공장도 설립할
계획으로 있다.
세계 어느나라에서든 이방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현지화가
필연적이듯 권사장도 현지에서 오랫동안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인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매년 5명씩의 대형 딜러를 한국에 초청, 향응을 베풀고 있는
등 지속적인 인간관계 유지에 노력하고 있다.
결국 현지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늦게 온 사람이 먼저 온 사람들의
관습이나 행동양식을 따를 수 밖에 없으며 비즈니스도 "히트 앤드 런"
식으로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인 약간의 손해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고 권사장은 강조한다.
말레이시아는 요즘 "아시아의 다섯마리째 용"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한국과의 교역도 꾸준히 증가, 한국의 10대 교역국으로 올라선
상태다.
이런 번영의 이면에는 권사장의 숨은 노력도 한 몫을 했다.
권사장은 89년엔 무역협회장 표창장을, 93년엔 국무총리 표창수여와 세계
상공인 총연합회 무궁화상을 받는 등 한국에서도 그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던가.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말레이시아로 건너와 결국 뜻을 이룬 말레이-
코리안 권병하사장은 이제는 한국과 말레이시아간 민간 경제협력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그에겐 70년대의 꿈많던 상사원 생활과 80년대 초의 정치적 좌절,
그리고 이후의 여러번에 걸친 사업상 실패들이 이젠 소중한 교훈이면서
아름다운 추억이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7일자).
말레이시아의 전기 엔지니어링 및 무역업체 헤니권(HENIKWON)사 권병하
사장(48)의 지금까지 인생은 한마디로 이렇게 부를 수 있다.
지난 82년까지의 인생은 정치적 야망을 이루어보기 위해 사업을 소홀히
하다 부도를 내고만 실패작.
반면 쫓기듯 말레이시아에 흘러든 이후의 또 다른 인생은 그를 자랑스런
말레이-코리안으로 만들어준 성공중의 성공이었다.
한때의 실패가 오히려 더 큰 성공의 밑바탕이 된 것.
지금도 권사장은 문득 어려웠던 젊은 날을 생각하며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는 대학 졸업후 대기업 계열 종합상사의 촉망받는 상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넘치는 패기와 자신감만을 믿고 개인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업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던 80년대 초 혼미한 정국의 와중에서
정치인으로의 길을 꿈꾸게 됐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몰두하다 사업을 소홀히 한 끝에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알거지가 돼버린 그는 가족들을 시골 친척집에 맡긴채 단돈 1,800달러를
손에 들고 무작정 서울을 떠났다.
목적지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상사 근무시절 홍콩 호주를 거쳐 가끔 출장을 다닐 때 말레이시아의
생활비가 상당히 저렴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목적지로
삼았다.
권사장에게 말레이시아는 행운의 땅이었다.
82년은 말레이시아의 현 정권인 마하티르 정권이 탄생할 무렵이었는데
그 후부터 말레이시아는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권사장의 사업도 이에 많이 도움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처음 이곳에 도착한 권사장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KOTRA
무역관에서 제공해 준 바이어 리스트와 약간의 카탈로그, 여관 전화번호부
에서 찢은 광고면이 전부였다.
하루 1,500원의 최소경비로 살아가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마침 한국의 청계천격인 현지 전기제품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용접기 취급상과 상담을 하게 됐고 이들로부터 한국 "신흥공업사"의 용접기
노즐을 수주, 첫 거래를 성사시켰다.
현지 진출 두달만에 720달러의 거금(?)을 손에 쥐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
그러나 수출한 제품의 품질이 수준미달이었기 때문에 곧 바이어의 외면을
당하고 그는 다시한번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경험을 통해 한국 전기제품이 품질은 일본제품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격에서는 경쟁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전기제품을 취급하게 된 계기였다.
83년 권사장은 재력있는 친구 5명과 동업으로 회사를 정식으로 설립,
시장개척에 노력했다.
"금성계전"의 커넥터를 연간 60만달러까지 수입하는 등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사업을 너무 방만하게 확장한 데다 경기불황이 심화되었고 설상
가상으로 품질에 대한 클레임까지 겹쳐 결국 회사는 문을 닫았다.
84년 다시한번 그는 재기의 칼을 갈고 "HENIKWON사" 를 설립했다.
몇번에 걸친 실패 경험은 그에겐 좋은 약이 되었다.
그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서 말레이시아 구석구석을 버스를
타고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50여개 배전반 업체와 시험기관을 상대로 본격적인 세일즈 상담을
전개했다.
당시만 해도 현지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5만달러
이상의 주문을 내는 바이어들은 무조건 한국을 방문시켜 그들과의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수출 초기에는 영국 규격을 따르는 현지의 품질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제품으로 수없이 클레임을 당했다.
그러나 일일이 교체해 주거나 보상해 주는 등 정성을 다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로 한국에 대한 현지의 인식이
제고되면서 수출은 더욱 확대되었다.
권사장은 한국의 동명전기에서 생산되는 절전형 램프를 수입, 시장을
개척키로 하고 상징적으로 왕궁에 소요되는 물량 30개를 공급한 적이
있었다.
어느날 왕실식구가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중 천장에 설치된 절전형
전구가 떨어져 내린 적이 있었다.
전구의 캡이 60W의 열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 버려 무거운 안정기와 함께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우선 필립스사 제품으로 모두 교체해 주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었고 사후 처리가 신속해 수입허가가 취소되는
등의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현지 진출의 선두주자인 일본 기업들로부터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권사장의 노력으로 금성계전 제품이 현지 시장에 많이 진출되자 금성
계전의 일본측 주주인 후지사는 이 제품을 다루지 못하도록 갖은 압력을
집요하게 가해왔다.
그는 "후지가 현지에서 금성제품을 취급하고 있지 않으니 금성계전의
제품이 많이 팔리는 게 오히려 주주 입장에서는 득이 아닌가"하고 후지측을
설득했다.
수개월에 걸친 노력으로 금성계전 제품에 대한 해외 판권을 가지고 있던
후지사가 말레이시아 시장만은 HENIKWON에 양보하게 됐다.
현지인 직원 때문에 말썽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타 회사보다 월등한 대우를 받으며 5년간 근무해온 직원이 어느날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5만달러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잘 타일러 계속 근무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어 3만달러를 주고 사표를
수리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동유럽 시장조사차 헝가리에 출장 가있는 사이 갑자기
회사로부터 긴급연락이 왔다.
세관 특별수사대가 회사에 들이닥쳐 장부 등 일체의 서류를 갖고 갔다는
것이다.
영문을 모른 채 잔여 일정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얼마전 회사를 그만두고 돈을 요구하던 현지직원이었다.
이곳에서는 신고한 사람에게 벌금 부과액의 10%를 보상금으로 주는 제도가
있다.
그래서 보상금을 타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이다.
그는 관세를 적게 내기 위해 거래가격 이하로 신고한 적이 몇번 있었다.
결국 8년간의 서류를 샅샅이 뒤지면서 조사하는 세무담당자에게 벌금으로
3,300만원을 추징당해야 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말레이시아 세무공무원 중 한글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한글 서신내용이 다소 감춰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권사장은 이제는 거의 모든 한국산 전기제품을 취급하는 대형 수입상으로
정착했다.
연간으로는 600만달러 어치.
전기제품을 취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난 92년에는
말레이시아 주정부와 합작, 전주공장도 세워 300만달러 어치의 한국선
설비를 도입한 바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다른 전기 관련제품 공장도 설립할
계획으로 있다.
세계 어느나라에서든 이방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현지화가
필연적이듯 권사장도 현지에서 오랫동안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인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매년 5명씩의 대형 딜러를 한국에 초청, 향응을 베풀고 있는
등 지속적인 인간관계 유지에 노력하고 있다.
결국 현지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늦게 온 사람이 먼저 온 사람들의
관습이나 행동양식을 따를 수 밖에 없으며 비즈니스도 "히트 앤드 런"
식으로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인 약간의 손해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고 권사장은 강조한다.
말레이시아는 요즘 "아시아의 다섯마리째 용"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한국과의 교역도 꾸준히 증가, 한국의 10대 교역국으로 올라선
상태다.
이런 번영의 이면에는 권사장의 숨은 노력도 한 몫을 했다.
권사장은 89년엔 무역협회장 표창장을, 93년엔 국무총리 표창수여와 세계
상공인 총연합회 무궁화상을 받는 등 한국에서도 그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던가.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말레이시아로 건너와 결국 뜻을 이룬 말레이-
코리안 권병하사장은 이제는 한국과 말레이시아간 민간 경제협력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그에겐 70년대의 꿈많던 상사원 생활과 80년대 초의 정치적 좌절,
그리고 이후의 여러번에 걸친 사업상 실패들이 이젠 소중한 교훈이면서
아름다운 추억이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