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참혹하고 처참했던 조선의 역사는 그 예술에다 남모르는
쓸쓸함과 슬픔을 아로 새긴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비애의 아름다움이 있다.

눈물이 넘치는 쓸쓸함이 있다.

이렇게도 비애에 찬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일제때 조선예술을 찬미했던 일본의 종교철학자 야나기 무미요시가 쓴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 (1920년 "개조"에 발표)의 한 토막이다.

그는 이처럼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로 규정하고 그것의 구체적 표현을
조선예술의 "선의 아름다움" "흰빛"에서 찾았다.

그의 이런 소녀 취향의 감상적인 비애의 미, 비애의 역사관은 당시
조선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주어 해방이된 뒤에도 그의 미론에서 그들이
탈피하기까지에는 수십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 야나기의 미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 야나기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사카와 노리다카,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다.

남대문소소학교의 교원으로 1913년 조선에 건너와 그 학교의 교장까지
지낸 노리다카는 조선의 백자에 심취해 전국을 도보로 편력하며 백자를
수집했다.

형을 따라 1914년 임업시험장 촉탁이 되어 조선에 온 다쿠미는
조선인들과 잘 어울렸다.

조선집에 살면서 생활집기도 조선것을 썼다.

숫제 한복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목공예품을 모아들였다.

도자기 역시 그의 수집품의 하나였다.

야나기가 일본에 있으면서 조선예술을 논할수 있었던 것이나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다 조선민족미술관을 꾸밀수 있었던 것도 아사카와 형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선에 17년동안 산 다쿠미는 "조선의 소반" (1929) "조선 도자명고"
(1931) 등의 책을 남긴뒤 41세때인 1931년 급성폐렴으로 급사했다.

학문적으로 체계를 잡아 쓴 저술이라기 보다는 소략한 자료집의 범주를
넘지못하는 책이다.

지난봄 이 두권의 번역본이 합본돼 나온데 이어 최근 다쿠미의 평전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 출간돼 민학회에서는 19일 다쿠미기념세미
나까지 연다고 한다.

다쿠미가 남긴 자료의 가치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책이 나온지 50여년이 지났는데도 비판적 평가한줄 내리지
못하고 선구적 작업이라고 극찬만 하고 있는 한국의 관련학계가 한심할
뿐이다.

"조선의 흙" 운운하는 감상적 풍토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