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인터뷰] 이회림 <동양화학 명예회장>에게 듣는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지난달 29일 장남 이수영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은퇴한 이회림
동양화학명예회장(79)은 마지막 개성상인이다.
포목상도 해보고 시멘트도 만들어봤지만 59년 동양화학을 설립한 뒤로는
정밀화학과 기초화학 분야에만 매달려 왔다.
기초화학은 예나 지금이나 시장규모가 작은데다 고급기술이 필요해
리스키한 업종.
이회장은 그러나 "공업이 발전하는 한 기초화학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악전고투 끝에 동양화학을 매출 1조5천억원 계열사 15개 종업원
6천명의 중견그룹으로 키워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열다섯살 때 개성의 한 포목점 점원으로 바닥부터
시작한 것 치고는 큰 성공"인 셈이다.
이회장은 고향도 개성이거니와 보수적 경영, 절제된 씀씀이, 신용을
중시해온 삶의 방식 등 송상의 기풍을 그대로 이어 왔다.
이회장을 본사 유화선 산업1부장이 소공동 동양화학빌딩 18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적지 않은 평수였지만 "마구 버리지 않는" 방주인의 성품탓인지 사무실은
오래된 물건들이 빼곡히 쌓여 비좁게 느껴졌다.
=======================================================================
-정말 건강해 보이십니다.
연세가 많다고는 하더라도 경영에서 손을 떼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예회장=건강하긴요.
그렇게 좋아하던 술자리도 이젠 피해 다니고.
과거엔 헬스클럽 다니는 사람을 보면 "참 한가한 사람이구나" 했는데
지금은 내가 헬스클럽에 나가는 상황이 됐는데요 뭘.
전화번호도 백개 정도는 외우고 나녔는데...
나이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러나 지금은 경기도 나쁘고 해서 타이밍 상 "경영대권"을 물려줄 때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신임회장에게 단단히 일러두신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이회장=그동안 사장 부회장으로 잘 해 왔으니 특별하게 새로 해 줄
얘기가 뭐 있겠습니까.
그저 "서두르지 말되 쉬지도 말아야 한다"는 내 나름의 "경영관"을 강조
했을 뿐입니다.
또 그룹 회장이 된 만큼 새로운 분야를 많이 개척해 보라는 아주 상식적인
말만 되풀이 했지요.
-새로운 분야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이회장=꼭 꼬집어서 이건 어떠냐 저걸 해보라고 하진 않았어요.
젊은 사람이니 잘 알아서 찾아내겠지요.
좋은 사업기회가 있으면 놓치지는 말라는 거지요.
-신임회장은 소비재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던데요.
<>이회장=그렇다고 화학공업의 범주를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나는 최종소비자에게 곧바로 파는 물건을 만드는 사업엔 관심이 없거든요.
오히려 정밀화학제품쪽에서 고부가가치 사업을 찾아야겠지요.
대신 수요가 쑥쑥 늘어날 수 있는 성장사업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건 알카리(소다회,가성소다)공업을 해온 경험에서 우러난 말입니다.
알카리제품은 수요신장 속도가 너무 느려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왜 그런 저성장산업에 뛰어드셨습니까.
<>이회장=소다회는 식품으로 치면 간장과 같은 거예요.
공업원료로 안들어가는 데가 없을 정돕니다.
그래서 공업국가가 되면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날 줄로 알았지요.
그러나 그게 판단 미스였어요.
60년대 중반에 하루 2백t 생산하던 걸 30년이 지난 지금도 1천2백t 밖에
못하니...
수요 신장이 그렇게 더딜 줄 누가 알았나요.
더구나 소다회는 경제개발 1차5개년 계획에 기간산업 육성품목으로 들어
있는 사업이었으니까 당연히 잘 될 줄로만 알았던 겁니다.
-5개년계획 품목이었다면 정부지원도 꽤 있었을 텐데요.
<>이회장=사실 정부 지원도 적지 않았죠.
정부가 자본금의 80%를 DLF 차관으로 밀어줬지요.
그러나 경험도 없고 기술력도 부족하고 해서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
했습니다.
공장건설만 해도 1년반이면 끝낼 것을 2년반이나 끌었지요.
제품이 나오니까 또 판로가 막히고.
생산량의 3분의 2 정도는 사갈 줄 알았던 인천판초장(현 한국유리)이
1년2개월치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바람에 만들어 놓고도 팔 곳이 없었던
겁니다.
그 회사도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한 신생업체의 실력을 믿을 수 없었던
거겠지요.
결국 동양화학은 69년 정부의 부실기업 정리대상업체가 돼버렸어요.
-그런데 어떻게 회사를 살렸습니까.
<>이회장=어떻게라도 살려야 한다는 판단에서 집을 팔았어요.
사는 것은 단칸방에 잠만 자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을 하고.
-집이 무척 좋았던 모양이지요.
<>이회장=성북동 29번지에 있던 그 집은 대지가 1천8백60평이나 됐습니다.
응접실도 크고 좋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내가 직접 지은 집이었지요.
서울시에서 재산세를 제일 많이 낼 정도였으니까.
호남정유를 운영하던 서정귀씨에게 1억8천만원 받고 팔 때는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1억8천만원이라면 별 도움이 안됐을 것 같습니다만.
<>이회장=직접적인 도움은 안됐지만 사주가 집까지 팔면서 회사를 살리려한
노력을 평가받았지요.
내가 집을 팔았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이 청와대까지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사람은 도와주라"고 했다는 겁니다.
당시 부실기업정리를 맡고 있던 장덕진씨를 만났는데 그이도 어려운 일을
했다며 정부의 저리자금을 지원해 줍디다.
참 고생이 많았지요.
-그렇게 고생을 했어도 소다회 사업에 미련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미국 와이오밍공장까지 인수하신 걸 보면 말입니다.
<>이회장=끝장을 본 거지요.
생산능력 세계 3위업체를 만들었으니 정말 기뻤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허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더군요.
-왜 그랬습니까.
<>이회장=우리는 솔베이법을 사용해 호주에서 들여온 소금을 전기분해하고
강원도에서 가져온 석회석과 섞어 중압해 소다회를 만드는데 거기선 그렇지
가 않았어요.
그저 석회석을 캐내서 물로 씻어내면 바로 소다회가 나오더란 겁니다.
우리는 원료 5t에 겨우 소다회 1t이 나오는데 와이오밍 공장에선 원료가
5t이면 소다회도 5t이 나와요.
그동안 헛 고생했다 싶은 생각이 드니 허탈할 수 밖에요.
-소다회 사업을 하기 전에는 시멘트사업도 하신 걸로 압니다만.
<>이회장=그랬습니다.
50년대 중반부터 문경시멘트를 운영했지요.
고이정림씨(대한유화창업주)와 함께 한 7~8년 했습니다.
그러나 시멘트 경기가 좋지않아 자금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재고가 많이 쌓여 시멘트업체에 체화자금이 지원됐지만 우리회사만 그런
혜택을 못받았어요.
결국 문경시멘트를 김성곤씨가 하던 쌍용시멘트에 넘겨버리고 손을 털어
버렸지요.
그 때 체화자금만 받았다면 지금쯤 다리 뻗고 북치고 살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금 시멘트를 보세요.
없어서 못 팔잖아요.
화학섬유나 압연공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이 얼마나 커졌습니까.
-이정림씨와는 개성에서부터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이회장=내가 15살때 강형근상점에 들어갔는데 그 때 같이 점원으로 일한
사람이 이정림씹니다.
나이가 나보다 4살 많아지만 친구처럼 지냈죠.
나는 원단을 팔았고 이씨는 고무신을 팔았어요.
이름이 비슷해서 형제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둘이서 그 때 신물나게 고생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니까 재계에선 회장께서 물러난 것을 보고
"마지막 송상"이 은퇴했다며 아쉬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회장=개성출신이라 그냥 그렇게들 불러주는 거겠지요.
나는 그저 부지런히 일하고 인내심을 기르면서 개성상인티를 내는 정도에
불과했지요.
-개성상인은 어떻게 길러졌나요.
<>이회장=수련과정이 엄격하다고 보면 됩니다.
예컨대 처음 3년간은 월급도 한 푼 안줍니다.
3년을 잘 견디면 수고비로 1백원 정도를 적립해 주고 한달에 10원씩 월급을
줍니다.
그걸로 끝나는게 아녜요.
또 10년 정도 더 데리고 있으면서 개성에 점포를 내줘도 되는지 지방에서
장사할 인물인지를 가려서 가게를 차려줍니다.
그렇게 어렵게 배우면 상도의가 철저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품목으로 옛주인과 다투거나 주인의 거래처를 뺏는 일은 절대 없지요.
-그렇다면 개성상인정신은 무엇입니까.
<>이회장=한마디로 절용절금이지요.
무조건 근검 절약하는 겁니다.
안쓰는 것을 버는 것으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또 신용을 중시합니다.
큰 돈을 남겨 먹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상혼이 조변석개하지만 그 때만 해도 아무리 손해가 나도 신용을
지켰습니다.
-일본의 오사카상인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들 하던데요.
<>이회장=비슷한 게 아니라 오사카 상인들이 개성에서 배워간 거예요.
다만 위험한 거래는 절대 안한다는 원칙주의에선 오사카상인들이 좀 더
철저해요.
흔히들 오사카를 "제2의 송도"라고들 합니다.
일본 국어책에도 송상이란 단어가 나온답니다.
개성상인을 최고로 친다는 얘기지요.
-근검 절약이라면 인천이나 수원도 못지 않을텐데요.
<>이회장=인천 사람들을 짜다고들 하지만 개성사람만 못해요.
인천사람이 절약한다고 치면 개성에선 아예 돈을 안쓴다고 보면 돼요.
수원은 인천보다 못하고요.
남한에선 오히려 안성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봅니다.
"돌방망이"라고들 하잖아요.
그 사람들도 정말 돈을 안쓰더라구요.
-안쓰는 걸 버는 걸로 안다는 것도 다 옛날 이야기 아닙니까.
쓰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은 게 요즘 세태라고 봅니다만.
<>이회장=지금의 과소비는 극에 달했어요.
더 이상 과소비는 있을 수 없을 정도예요.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합니다.
소비는 수입에 맞춰 써야하는데 연.월차수당과 보너스가 있으니 오늘
없더라도 내일 모레면 또 돈이 나온다며 미리 다 써버려요.
백화점의 바겐세일도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어요.
재고를 처리하는게 아니라 바겐세일용 상품을 따로 만들어 놓고 꽹과리
치면서 손님들을 불러 모으고 있잖아요.
그뿐입니까.
크레디트카드도 외상을 조장하지요.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식으로.
-그러면 회장께서는 크레디트카드를 사용 않습니까.
<>이회장=헬스클럽 들어갈 때 쓰는 법인카드 한장을 갖고 다니긴 하지요.
다른덴 절대로 안써요.
-그럼 돈은 벌어서 뭘 하나요.
<>이회장=기업의 이윤은 사회에 환원해야지요.
내가 인천에 송도미술관을 세우고 김구선생동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는게
그런 거지요.
이런데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특별히 인천에 집착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회장=동양화학이 인천에 터를 잡고 있잖아요.
30년넘게 사업해온 곳이지요.
인천상공회의소 회장도 2번이나 했습니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송도고교도 인천에 있고요.
친구들도 대부분 인천에 삽니다.
인천지역 원로 13명이 모여 만든 "일삼회" 활동이 제일 재미있기도 하고.
인천지역에 민방사업신청을 낸 것도 그런 사연이 있어요.
나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거든요.
-경영을 오래해 보신 분들은 감으로 경기를 읽는다고들 합니다만 회장께선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지금의 불황을 어느 정도로 느끼십니까.
<>이회장=아직 멀었어요.
한참 더 떨어져서 밑바닥까지 가야 살아날 겁니다.
우선 사람들의 근로의욕이 땅에 떨어져 있으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기브 미(give)"는 있어도 "테이크 유(take you)"는 없어요.
젊을 땐 고된 일이건 위험한 일이건 의욕을 갖고 해야 하는데 3D업종이 다
뭡니까.
공과대학 나온 사람이 기름냄새를 싫어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업들도 정신을 차려야 해요.
국내에선 계산이 안나온다고 해외로 몰려 나가는데 그것이 1백% 옳지는
않다고 봐요.
일본이나 미국은 몰라서 안나간답니까.
자기 나라를 누가 지키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제조업은 아주 먼 장래를 보고 하는 것이죠.
후회를 하는 일이 있더라두요.
<정리=권영설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9일자).
동양화학명예회장(79)은 마지막 개성상인이다.
포목상도 해보고 시멘트도 만들어봤지만 59년 동양화학을 설립한 뒤로는
정밀화학과 기초화학 분야에만 매달려 왔다.
기초화학은 예나 지금이나 시장규모가 작은데다 고급기술이 필요해
리스키한 업종.
이회장은 그러나 "공업이 발전하는 한 기초화학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악전고투 끝에 동양화학을 매출 1조5천억원 계열사 15개 종업원
6천명의 중견그룹으로 키워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열다섯살 때 개성의 한 포목점 점원으로 바닥부터
시작한 것 치고는 큰 성공"인 셈이다.
이회장은 고향도 개성이거니와 보수적 경영, 절제된 씀씀이, 신용을
중시해온 삶의 방식 등 송상의 기풍을 그대로 이어 왔다.
이회장을 본사 유화선 산업1부장이 소공동 동양화학빌딩 18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적지 않은 평수였지만 "마구 버리지 않는" 방주인의 성품탓인지 사무실은
오래된 물건들이 빼곡히 쌓여 비좁게 느껴졌다.
=======================================================================
-정말 건강해 보이십니다.
연세가 많다고는 하더라도 경영에서 손을 떼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예회장=건강하긴요.
그렇게 좋아하던 술자리도 이젠 피해 다니고.
과거엔 헬스클럽 다니는 사람을 보면 "참 한가한 사람이구나" 했는데
지금은 내가 헬스클럽에 나가는 상황이 됐는데요 뭘.
전화번호도 백개 정도는 외우고 나녔는데...
나이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러나 지금은 경기도 나쁘고 해서 타이밍 상 "경영대권"을 물려줄 때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신임회장에게 단단히 일러두신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이회장=그동안 사장 부회장으로 잘 해 왔으니 특별하게 새로 해 줄
얘기가 뭐 있겠습니까.
그저 "서두르지 말되 쉬지도 말아야 한다"는 내 나름의 "경영관"을 강조
했을 뿐입니다.
또 그룹 회장이 된 만큼 새로운 분야를 많이 개척해 보라는 아주 상식적인
말만 되풀이 했지요.
-새로운 분야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이회장=꼭 꼬집어서 이건 어떠냐 저걸 해보라고 하진 않았어요.
젊은 사람이니 잘 알아서 찾아내겠지요.
좋은 사업기회가 있으면 놓치지는 말라는 거지요.
-신임회장은 소비재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던데요.
<>이회장=그렇다고 화학공업의 범주를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나는 최종소비자에게 곧바로 파는 물건을 만드는 사업엔 관심이 없거든요.
오히려 정밀화학제품쪽에서 고부가가치 사업을 찾아야겠지요.
대신 수요가 쑥쑥 늘어날 수 있는 성장사업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건 알카리(소다회,가성소다)공업을 해온 경험에서 우러난 말입니다.
알카리제품은 수요신장 속도가 너무 느려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왜 그런 저성장산업에 뛰어드셨습니까.
<>이회장=소다회는 식품으로 치면 간장과 같은 거예요.
공업원료로 안들어가는 데가 없을 정돕니다.
그래서 공업국가가 되면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날 줄로 알았지요.
그러나 그게 판단 미스였어요.
60년대 중반에 하루 2백t 생산하던 걸 30년이 지난 지금도 1천2백t 밖에
못하니...
수요 신장이 그렇게 더딜 줄 누가 알았나요.
더구나 소다회는 경제개발 1차5개년 계획에 기간산업 육성품목으로 들어
있는 사업이었으니까 당연히 잘 될 줄로만 알았던 겁니다.
-5개년계획 품목이었다면 정부지원도 꽤 있었을 텐데요.
<>이회장=사실 정부 지원도 적지 않았죠.
정부가 자본금의 80%를 DLF 차관으로 밀어줬지요.
그러나 경험도 없고 기술력도 부족하고 해서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
했습니다.
공장건설만 해도 1년반이면 끝낼 것을 2년반이나 끌었지요.
제품이 나오니까 또 판로가 막히고.
생산량의 3분의 2 정도는 사갈 줄 알았던 인천판초장(현 한국유리)이
1년2개월치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바람에 만들어 놓고도 팔 곳이 없었던
겁니다.
그 회사도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한 신생업체의 실력을 믿을 수 없었던
거겠지요.
결국 동양화학은 69년 정부의 부실기업 정리대상업체가 돼버렸어요.
-그런데 어떻게 회사를 살렸습니까.
<>이회장=어떻게라도 살려야 한다는 판단에서 집을 팔았어요.
사는 것은 단칸방에 잠만 자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을 하고.
-집이 무척 좋았던 모양이지요.
<>이회장=성북동 29번지에 있던 그 집은 대지가 1천8백60평이나 됐습니다.
응접실도 크고 좋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내가 직접 지은 집이었지요.
서울시에서 재산세를 제일 많이 낼 정도였으니까.
호남정유를 운영하던 서정귀씨에게 1억8천만원 받고 팔 때는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1억8천만원이라면 별 도움이 안됐을 것 같습니다만.
<>이회장=직접적인 도움은 안됐지만 사주가 집까지 팔면서 회사를 살리려한
노력을 평가받았지요.
내가 집을 팔았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이 청와대까지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사람은 도와주라"고 했다는 겁니다.
당시 부실기업정리를 맡고 있던 장덕진씨를 만났는데 그이도 어려운 일을
했다며 정부의 저리자금을 지원해 줍디다.
참 고생이 많았지요.
-그렇게 고생을 했어도 소다회 사업에 미련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미국 와이오밍공장까지 인수하신 걸 보면 말입니다.
<>이회장=끝장을 본 거지요.
생산능력 세계 3위업체를 만들었으니 정말 기뻤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허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더군요.
-왜 그랬습니까.
<>이회장=우리는 솔베이법을 사용해 호주에서 들여온 소금을 전기분해하고
강원도에서 가져온 석회석과 섞어 중압해 소다회를 만드는데 거기선 그렇지
가 않았어요.
그저 석회석을 캐내서 물로 씻어내면 바로 소다회가 나오더란 겁니다.
우리는 원료 5t에 겨우 소다회 1t이 나오는데 와이오밍 공장에선 원료가
5t이면 소다회도 5t이 나와요.
그동안 헛 고생했다 싶은 생각이 드니 허탈할 수 밖에요.
-소다회 사업을 하기 전에는 시멘트사업도 하신 걸로 압니다만.
<>이회장=그랬습니다.
50년대 중반부터 문경시멘트를 운영했지요.
고이정림씨(대한유화창업주)와 함께 한 7~8년 했습니다.
그러나 시멘트 경기가 좋지않아 자금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재고가 많이 쌓여 시멘트업체에 체화자금이 지원됐지만 우리회사만 그런
혜택을 못받았어요.
결국 문경시멘트를 김성곤씨가 하던 쌍용시멘트에 넘겨버리고 손을 털어
버렸지요.
그 때 체화자금만 받았다면 지금쯤 다리 뻗고 북치고 살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금 시멘트를 보세요.
없어서 못 팔잖아요.
화학섬유나 압연공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이 얼마나 커졌습니까.
-이정림씨와는 개성에서부터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이회장=내가 15살때 강형근상점에 들어갔는데 그 때 같이 점원으로 일한
사람이 이정림씹니다.
나이가 나보다 4살 많아지만 친구처럼 지냈죠.
나는 원단을 팔았고 이씨는 고무신을 팔았어요.
이름이 비슷해서 형제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둘이서 그 때 신물나게 고생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니까 재계에선 회장께서 물러난 것을 보고
"마지막 송상"이 은퇴했다며 아쉬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회장=개성출신이라 그냥 그렇게들 불러주는 거겠지요.
나는 그저 부지런히 일하고 인내심을 기르면서 개성상인티를 내는 정도에
불과했지요.
-개성상인은 어떻게 길러졌나요.
<>이회장=수련과정이 엄격하다고 보면 됩니다.
예컨대 처음 3년간은 월급도 한 푼 안줍니다.
3년을 잘 견디면 수고비로 1백원 정도를 적립해 주고 한달에 10원씩 월급을
줍니다.
그걸로 끝나는게 아녜요.
또 10년 정도 더 데리고 있으면서 개성에 점포를 내줘도 되는지 지방에서
장사할 인물인지를 가려서 가게를 차려줍니다.
그렇게 어렵게 배우면 상도의가 철저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품목으로 옛주인과 다투거나 주인의 거래처를 뺏는 일은 절대 없지요.
-그렇다면 개성상인정신은 무엇입니까.
<>이회장=한마디로 절용절금이지요.
무조건 근검 절약하는 겁니다.
안쓰는 것을 버는 것으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또 신용을 중시합니다.
큰 돈을 남겨 먹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상혼이 조변석개하지만 그 때만 해도 아무리 손해가 나도 신용을
지켰습니다.
-일본의 오사카상인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들 하던데요.
<>이회장=비슷한 게 아니라 오사카 상인들이 개성에서 배워간 거예요.
다만 위험한 거래는 절대 안한다는 원칙주의에선 오사카상인들이 좀 더
철저해요.
흔히들 오사카를 "제2의 송도"라고들 합니다.
일본 국어책에도 송상이란 단어가 나온답니다.
개성상인을 최고로 친다는 얘기지요.
-근검 절약이라면 인천이나 수원도 못지 않을텐데요.
<>이회장=인천 사람들을 짜다고들 하지만 개성사람만 못해요.
인천사람이 절약한다고 치면 개성에선 아예 돈을 안쓴다고 보면 돼요.
수원은 인천보다 못하고요.
남한에선 오히려 안성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봅니다.
"돌방망이"라고들 하잖아요.
그 사람들도 정말 돈을 안쓰더라구요.
-안쓰는 걸 버는 걸로 안다는 것도 다 옛날 이야기 아닙니까.
쓰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은 게 요즘 세태라고 봅니다만.
<>이회장=지금의 과소비는 극에 달했어요.
더 이상 과소비는 있을 수 없을 정도예요.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합니다.
소비는 수입에 맞춰 써야하는데 연.월차수당과 보너스가 있으니 오늘
없더라도 내일 모레면 또 돈이 나온다며 미리 다 써버려요.
백화점의 바겐세일도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어요.
재고를 처리하는게 아니라 바겐세일용 상품을 따로 만들어 놓고 꽹과리
치면서 손님들을 불러 모으고 있잖아요.
그뿐입니까.
크레디트카드도 외상을 조장하지요.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식으로.
-그러면 회장께서는 크레디트카드를 사용 않습니까.
<>이회장=헬스클럽 들어갈 때 쓰는 법인카드 한장을 갖고 다니긴 하지요.
다른덴 절대로 안써요.
-그럼 돈은 벌어서 뭘 하나요.
<>이회장=기업의 이윤은 사회에 환원해야지요.
내가 인천에 송도미술관을 세우고 김구선생동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는게
그런 거지요.
이런데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특별히 인천에 집착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회장=동양화학이 인천에 터를 잡고 있잖아요.
30년넘게 사업해온 곳이지요.
인천상공회의소 회장도 2번이나 했습니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송도고교도 인천에 있고요.
친구들도 대부분 인천에 삽니다.
인천지역 원로 13명이 모여 만든 "일삼회" 활동이 제일 재미있기도 하고.
인천지역에 민방사업신청을 낸 것도 그런 사연이 있어요.
나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거든요.
-경영을 오래해 보신 분들은 감으로 경기를 읽는다고들 합니다만 회장께선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지금의 불황을 어느 정도로 느끼십니까.
<>이회장=아직 멀었어요.
한참 더 떨어져서 밑바닥까지 가야 살아날 겁니다.
우선 사람들의 근로의욕이 땅에 떨어져 있으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기브 미(give)"는 있어도 "테이크 유(take you)"는 없어요.
젊을 땐 고된 일이건 위험한 일이건 의욕을 갖고 해야 하는데 3D업종이 다
뭡니까.
공과대학 나온 사람이 기름냄새를 싫어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업들도 정신을 차려야 해요.
국내에선 계산이 안나온다고 해외로 몰려 나가는데 그것이 1백% 옳지는
않다고 봐요.
일본이나 미국은 몰라서 안나간답니까.
자기 나라를 누가 지키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제조업은 아주 먼 장래를 보고 하는 것이죠.
후회를 하는 일이 있더라두요.
<정리=권영설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