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도 수입하는 마당에 돈은 왜 수입개방이 안되나. 재무부는 금융을
산업의 혈액이라고 하지만 실물이 아닌 증시만 개방하는 것은 혈액이 아니라
물을 먹이는 것이다. 재무부가 금융산업을 보호만 하는건 마약을 주는 것과
같다"

지난 94년6월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경제부처 장차관과 3급이상 경제관료
1백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경제부처 정책
토론회".

당시 박운서상공부차관(현한국중공업 사장)은 이 토론회에서 재무부의
"외자 금수"를 맹공했다.

국제 금융시장엔 한국보다 3~4배나 낮은 금리의 싼돈이 널려 있는데도
규제로 그걸 못끌어다 쓰는 기업들의 답답함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지금-.

당시 규제의 원흉이었던 재무부는 재정경제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경제개방도 많이 진전됐다.

그렇다면 기업들의 답답증은 과연 가셨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일부 자본도입 규제가 풀리긴 했지만 한국의 19세기적 금융쇄국 기조는
그대로이다.

2중 3중의 "규제 그물"로 해외차입이 봉쇄돼 있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경쟁국의 배가 넘는 살인적 고금리도 변함 없는건 물론이다.

우선 연리 6~7%로 기업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상업차관.

정부는 여전히 꽉 틀어 쥔 돈줄을 놓지 않고 있다.

지난 19일 재경원이 상업차관 허용대상을 모든 중소기업과 사회간접자본
(SOC) 참여기업 등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는 했지만 "알맹이"는 빠졌다.

정작 허용을 졸라온 대기업들은 배제된 것.

그래서 상업차관은 사실상 대표적인 "수입금지 자금"으로 분류된다.

"상업차관은 보통 5백만달러 이상을 조달해야 경제성이 있다.

그런데 현재 상업차관이 허용된 중소기업들은 외화자금수요가 대부분
1백만달러 이하다.

대외신용도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지난해 상업차관 도입실적이 4천만달러에 그쳤던 것도 이런 이유다"(H그룹
L이사)

상업차관 규제완화의 실효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해외증권 발행도 기업들의 성에 안차기는 매한가지다.

국제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들은 외국 주식시장에서 채권등 각종 증권을
발행해 국내 금리의 절반수준에서 얼마든지 돈을 끌어 쓸수 있다.

하지만 발행한도나 용도등이 얼기설기 제한돼 있다.

"발행한도는 총발행주식의 15%이내여야 하며 같은 법인은 연간 3억달러,
같은
계열은 연간 4억달러 이하"(해외증권발행규정,재경원지침)라는
식이다.

"16메가D램 반도체 설비증설에 최소한 연간 12억~13억달러가 소요된다.

기껏 3억~4억달러의 해외증권발행은 큰 도움도 안된다"(S전자 C이사)
국내 금융기관이 외국에서 꿔와 기업들에 다시 빌려주는 외화대출도
규제 투성이다.

융자대상이 해외직접투자자금이나 시설재수입용으로만 묶여 있다.

외화대출 재원도 절반이상은 반드시 만기 3년이상의 장기로 조달해야 한다.

이처럼 외국의 싼 돈을 국내기업이 갖다 쓸 수 있는 길은 요리조리 막혀
있다.

물론 정부의 해외차입 규제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인플레 우려다.

"외국의 싼 자금이 마구 국내에 들어오면 통화가 증발해 물가를 올려놓을게
뻔하다. 물가가 오르면 다시 고금리를 야기할텐데 막을 수 밖에..."
(김원태 한국은행이사)

국내금융기관에 대한 보호심리도 숨어 있다.

"외국의 저리자금이 들어오면 어차피 국내의 고금리 자금과 경쟁을
벌일텐데 아직 국내 금융기관은 그럴 태세가 안돼있다"(재경원 A국장)는
논리다.

그러나 이같은 염려는 그야말로 "기우"라는게 업계의 목소리다.

"통화증발등의 부작용은 정책대응으로 보완해야할 문제다. 그게 해외차입을
불허할 빌미는 안된다. 또 국내 금융기관의 경쟁력 문제는 개방속도를 조절
하면 해결할 수 있다. 오히려 외국인 주식투자는 대폭 허용하면서도 산업
자금 유입을 굳이 막는건 이해할 수 없다"(전경련 관계자)

"기업들에 외자도입을 허용하면 실보다 득이 많다. 기본적으로 싼 외국
돈이 많이 들어와 비싼 국내자금과 섞이면 자연히 금리가 떨어진다. 또
대기업들이 외국에서 돈을 끌어 쓰면 그만큼 국내자금 수요가 줄어
중소기업의 숨통도 트일 것이다"(한상춘 대우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그런 실례도 있다.

1차 오일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일본경제는 지난 74년 소비자물가가 23%,
시장금리는 12.54%까지 급등했다.

2차대전후 최고수준이었다.

이때 일본정부는 기업들의 금융비용을 덜어주기 위해 해외증권발행등 외자
조달을 파격적으로 허용했다.

외국인 투자자유화등도 단계적으로 시행했다.

덕분에 74년 마이너스를 보였던 경제성장률은 76년이후 5%대로 올라섰고
경상수지도 적자에서 흑자로 반전됐다.

두자리수의 물가와 금리가 둘다 5% 이내로 안정된건 물론이다.

외자개방이 고금리 해소의 첩경임은 한국경제라고 예외가 아닐 것이다.

<정리=차병석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