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오픈에서의 캐리 웹 (22, 호주) 실격사건후 나타난 상황들이
재미있다.

캐리 웹은 실격당일 기자들에게 배포한 발표문에서 "주변이 너무
복잡하고 심신이 아주 피곤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일이 빚어졌다"고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발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묘한 구절도 있었다.

즉 "모든일은 자신의 책임이며 실수이지만 KLPGA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측이 본인이 사인을 잊었음을 주지시켜주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라는
내용이다.

KLPGA경기위원회로서는 이보다 더 모욕적인 일이 없다.

스코어카드를 제출하는 절차상으로 볼때 본인으로부터 "비 공식적으로
확인 좀 해달라"는 요청이 없는한 경기위원회가 사인여부를 체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내 경기에서도 스코어카드를 둘러싼 실격은 종종 일어난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은 정신이 "붕" 떠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선수들은 마커와 카드를 교차 확인하며 어떤 선수는
카드통에 카드를 떨어뜨리기 전에 경기위원들에게 "비공식적 확인"을
부탁하기도 한다.

결국 사인누락은 어떤 경우든 변명이 있을 수 없는데 "유감" 운운한
것은 캐리 웹이나 발표문을 만든 주최측의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또 "15번홀 트리플보기등과 경기지연, 갤러리운집 등으로 심신이 너무
피곤했다"는 본인의 설명과 "그 설명이 타당성이 있다"는 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일부 시각도 비상식적이다.

그런 설명은 프로 초년생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미상금 랭킹1위의
세계 정상급 선수가 할 말은 아니다.

경기지연도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지연된 것이고 갤러리문제는
"인기 프로"스스로 소화시켜야 할 문제이다.

대회진행과 사인여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도 간접적 영향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캐리 웹"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특별대우 의식에
기인한다.

만약 한국의 이름없는 선수가 사인을 안 했고 그가 그런 얘기를 했다면
일고의 논란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의전상 "대우"는 있을 수 있지만 규칙상 "대우"는 캐리 웹이나 한국의
상금랭킹 100위 선수나 다를 게 없다.

최악의 "수치"에도 불구,캐리 웹이 기자회견및 사인회를 하고 "10월의
삼성세계여자선수권대회에서 불명예를 씻겠다"고 다짐한 것은 선수로서의
귀감이다.

혹시라도 캐리 웹의 발표문이 주최측인 제일모직의 "곤경 회피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길 바란다.

( 김흥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