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4년 11월.

자금시장에선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제3차 한국통신주식 입찰결과 최저낙찰가가 무려 주당 4만7천1백원으로
결정된 것.

예정가(주당 3만1천원)보다 무려 1만6천1백원이나 높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경쟁률 42.6대 1에 입찰보증금만 1조4천5백억원에 달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열흘후 실시된 중소기업은행 주식공모에 비하면 그랬다.

2조1천4백억원이나 몰려들었으니 말이다.

"1조4천5백억원"과 "2조1천4백억원".

합이 3조5천9백억원이나 되는 돈이 열흘사이에 동원됐다.

당시 총통화(1백26조원)의 2.7%에 달하는 규모다.

그러나 한국통신주식입찰의 경우 보증금이 청약금액의 10%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장 주식청약에 동원할 수 있는 여유자금은 5배(14조5천억원+
2조1천4백억원)로 불어난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만 노리는 단기부동자금이 이만큼이나 많다는 얘기다.

부동자금이란 다른게 아니다.

고수익을 좇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돈이다.

이른바 대기성자금이다.

이런 속성상 한번 투입되면 장기간 잠기게 돼 "기동력"이 떨어지는 생산
자금으로 흘러갈리는 만무하다.

한마디로 "비생산 투기성자금"의 다른 말이다.

통화당국은 "돈을 많이 풀면 물가를 자극하고 금리를 부추긴다"
(박철 한국은행자금부장)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

맞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돈"은 아무런 구분이 없다.

투기성자금도, 생산자금도 모두 "돈"으로 표현된다.

업계에서 주장하는 "돈"은 통화당국의 돈과는 사뭇 다르다.

생산자금만을 말한다.

따라서 "돈을 풀라"는 업계의 요구는 돈의 총량을 늘려 달라는게 아니라
"투기성자금을 생산성자금으로 돌리라"는 주문에 다름아니다.

그러면 통화팽창이나 물가 및 금리상승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돈을 풀고도 금리는 떨어지는 "기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통화당국은 "우리 상황에서 한자릿수 금리는 환상"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돈이 많은데도 정작 기업이 빌려쓸 돈은 모자라는 악순환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길은 투기성자금을 해소하는 것 뿐"(제일경제연구소 안동규 책임
연구원)인데도 말이다.

비생산 투기성 자금은 단기부동자금만 있는게 아니다.

금융실명제실시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사채자금도
분명한 투기성자금이다.

현재 사채시장 규모는 조사기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8조4천억원~27조
원정도(한국금융연구원)로 추산되고 있다.

이 돈만 제도권으로 유입된다면 금리를 2-3%포인트 낮추는건 시간문제다.

비생산적인 곳으로 흘러가는 돈은 또 있다.

바로 가계대출이다.

한국통신과 중소기업은행 공모가 있던 94년 11월 한달간 가계대출은
1조원에 달했다.

가계대출은 한번 대출되면 갚는데 시간이 걸리고 소액자금 위주여서
소비자금화되는 게 특징이다.

실제 주식공모가 끝난 뒤에도 이 돈은 한동안 환류되지 않고 부동자금으로
떠돌았다.

이후도 마찬가지다.

예금은행의 가계대출금이 총대출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92년 22.2%
에서 지난 5월말엔 27.8%(45조원)까지 상승했다.

일본이 같은 기간 동안 16.8%에서 16.3%로 줄어든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되고 있다.

"공장으로 가야할 돈을 "집"에서 당겨 써서 금리의 상승행진을 부추기고
있는 것"(거평그룹 이용수상무)이다.

금리를 부풀리는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되는 기업들의 자금가수요는 이같은
구조에선 너무나 당연한 결과로 나타난다.

"지난 94년말이다.

연말자금을 확보해야 하는데 주식공모로 돈은 다 빠져나갔다.

고리라도 잡아야 했다.

당국의 통화관리는 실종돼 있었다"(H그룹 J전무)는 얘기는 국내 고금리의
원인과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뭉칫돈이 떠돌아 다니고 사금융만 비대해진데다 신용카드대출이다 뭐다해서
가계대출은 늘어만가니 기업의 심리적 가수요는 줄어들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부동산값이 비교적 안정됐다고는 하나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보면 결론은 분명해진다.

금리를 국제수준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투기성자금의 물꼬를 생산자금으로
돌리는게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실물경제를 안정시키면서 음성자금이 은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하는 것 외엔 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부동산가격이 들먹거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고 저축유인책을 내놓아야 한다.

돈이 기업활동에 흘러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역시 통화당국의 책임이다.

이를 위한 "규제"는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는 게 기업들의 주장이다.

자고 일어나면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전경련 관계자 조차 "규제완화의
바람을 타고 투기성자금의 차단방벽까지 풀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할
정도다.

이는 곧 "투기성자금의 생산자금화를 통한 금리거품제거가 그만큼
시급하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 정리 = 권영설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