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30일부터는 주식을 사거나 팔 때 호가를 확정짓지 않고 수량만
적어내면 시장시세에 맞게 주문이 체결됩니다.

또 장이 끝난 뒤에도 당일 종가로 주식을 사고 팔 수 있게 됩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증권매매제도가 한단계 뛰어올라 선진국수준으로
진입하는 겁니다."

증권거래소가 올초부터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편 새증권전산시스템 "시스템
2000"의 주요 골자다.

그러나 이런 달콤한 유혹은 "한달"이라는 꼬투리를 단 채 무기한
연기됐다.

"준비미비"라는 "그들만"의 이유로 "약 1개월가량의 시험가동을 거친뒤
시스템 2000의 본격가동여부를 재론한다"(증권사 사장단회의)고 "결정"됐다.

이해당사자인 투자자들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됐다.

새 시스템의 도입연기는 건설회사(증권전산)와 발주자(거래소),
원청자(증권사) 및 감리회사(재정경제원)의 합작이 만들어낸 부실공사였다.

게다가 하자보수를 언제 끝내고 정식 입주하게 될지는 백년하청이다.

그런데도 관계자들은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다.

"예탁금 변동현황표나 외국인주문 등에서 문제가 발생해 당초 예정대로
시스템2000을 가동시킬 수 없다"는 증권사 지적에 대해 증권전산은 "가동
전에 문제점을 깨끗이 고칠 수 있어 가동연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팽팽히
맞섰다.

발주자인 거래소는 "믿어달라"로 일관했고 협회는 "어어"하다 막마지에
이르렀다.

일단 "닭과 알의 싸움"은 대우증권을 중심으로 한 일부 증권사들의
"판정승"으로 끝났으나 고래싸움에 새우등은 크게 터졌다.

이번 새 증권전산시스템 준비는 "벼락치기" 시험공부와 다를게 없다.

시간 많을 때는 펑펑 놀다가 시험날이 다가와서야 밤샘을 해대며 야단
법석을 떨어도 성적이 오를리 만무다.

새 시스템은 지난 93년11월 95년9월말 가동을 예정으로 추진됐다.

그중에 성수대교 붕괴후 부실공사 방지를 위한 감리강화로 거래소 건물
완공이 늦어졌다는 외인에 의해 슬그머니 1년 연기됐다.

그러다 이번에는 증권전산과 증권사간의 책임 떠넘기기라는 내홍에 의해
또다시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됐다.

시스템2000은 약2,000억원이 들어간 거액 프로젝트다.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증권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큰 공사가 부실투성인데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공은 다투고 과는 미루려는 것같아 아쉽기만 하다.

홍찬선 < 증권부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