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직칼럼] 정악과 민속악 .. <논설위원>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전통유교사회에서는 "음악으로 마음을 고르게 하고 예법으로 외양을
다듬는다"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었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예법은 사람의 행실을
올바르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와 악은 인간이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예기"에는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음악은 평화롭고 즐거우나 정치가
어지러운 나라의 음악은 원망스럽고 노엽다는 말도 있다.
또 음악을 가리켜 "덕의 꽃"이라고 정의한 귀절도 나온다.
이런 것을 보면 유교만큼 음악을 중시했던 종교도 없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은 사회의 일체화를 이루는 근원적
추진력이 된다는 사실을 옛 사람들도 이처럼 잘 알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사람들과 노래부르는 것을 즐겼고 순임금이 지은
현가 소악 등의 음악도 감상했으며 노나라 태사에게 음악이론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꾸는 데는 음악과 예법만한 것이 없다는
말도 남겼다.
그러나 이토록 음악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왕조의 음악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중의 감정과 전통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중의 감정과 전통을 무시하고 한문에 얽매인 시문과 중국제도를 따른
아악은 대중속에 파고들지 못했다.
대중은 유교식예법을 따랐지만 음악은 신라때부터 전승돼온 고유의 향악을
썼다.
그래서 예법이 우세한 가운데 결국 음악의 교화기능은 이상적으로
발휘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사회에서는 끊임없는 지식인들의 예법논쟁속에 위엄있고 긴장감을
지닌 선비의 모습이 부각되었지만 화락하고 온화한 선비의 본래 모습은
퇴색해 버렸다.
예법이 음악을 짓눌러버린 탓이다.
"음악이 지나치면 멋대로 놀아나고 예에 치우치면 뿔뿔이 흩어진다"는
옛말 처럼 예에 치우친 조선왕조 양반계층의 음악은 대중교화의 역할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고 백성들의 음악과 괴리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세종대왕처럼 우리식 악기를 만들고 악곡을 짓고 악보를 편찬시켜
음악으로 백성을 교화하려 했던 임금도 있었다.
선비중에서도 퇴계 이황같은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노래가사와 곡조가
음란하고 상스런 것을 탄식하면서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산십이곡"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노래의 광범한 보급과 생활화에 적극적으로 힘쓰지는 않았다.
또 고종때 김일부가 "정역"이라는 새로운 역학을 체계화하면서 "음 아 이
오 우"라는 오음만으로 영가를 부르고 무도에 힘썼던 것은 교화방법의
개혁안을 위한 시도였으나 그 역시 역부족이었다.
과거야 어찌됐든 오늘날 한국의 음악은 복잡하게 나뉘고 또 얽혀져 있다.
먼저 국악과 양악으로 나뉘고 국악은 정악과 민속악으로, 양악은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다시 나뉘어져 있다.
학계에서는 "한국음악"이니 "민족음악"이니 하는 논의도 있지만 실은 그
정체가 어떤 것인지조차 모호한 형편이다.
오늘날은 대중음악의 지대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구비로 전승된 판소리 시나위 산조 잡가 민요 농악 등
무엇인가 모자라는 음악으로 대접받던 민속악이 활기를 띄고 있다.
반대로 아락 가곡 가사 시조 등 이른바 정락은 한없이 움츠러 들고 있다.
그것들은 중국음악의 아류 아니면 "양반계급"의 전유물이고 민속악이야
말로 "서민층이 즐기던 진정한 우리음악"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
우리들에게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묘제례악을 제외하면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모든 아악곡들은
이미 향락화되어 버린 우리음악들이다.
정악이나 민속악이나 모두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악은 높은 교양을 갖췄던 지식인들이 갈고
다듬어 즐겁거나 슬픈 감정을 가능한 한 역제한 예술성이 강한 것이고,
민속악은 지역적 특징이 강하며 비교적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최대한 표출한
소박한 음악이라는 점이다.
"밥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는 말도 있듯 역시 대중성이 없으면
외면당하게 마련인 것이 요즘 세태인가 보다.
국안보다는 대접이 백번낫겠지만 이런 상황은 서양고전음악의 경우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와중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우리의 전통적 기탁이나 선율이 어떤
것인지 들어보지도 못한채 서양의 대중가요와 춤에 휩쓸려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매스 미디어는 아직 대중의 유일한 오락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TV는 오락전달에 가장 적합한 매체다.
방송은 전통문화를 옳게 전승하고 건전한 대중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으뜸가는 도구다.
또 방송은 인간개인은 물론 사회규범 문화형태까지도 변용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점에서 방송사들은 대중음악 일변도로 국민의 문화감성에 해를
입혀서는 안되고 깊이 있는 정신문화의 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다양한 질과 내용의 대중음악이 혼재 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상황이라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대중음악현상은 저질적으로 평준화된 대중음악의
획일화다.
전통명절을 맞으면 각 방송사들이 인심이라도 쓰듯 다투어 국악프로그램을
마련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한복을 차려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국악인들의 민요가락이 나오면 짜증스럽기만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음악이 있었나싶게 아악도 들려주고 가곡이나 가사
시조도 들려주었으면 한다.
이번 추석에는 민속악 뿐만 아니라 정악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5일자).
다듬는다"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었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예법은 사람의 행실을
올바르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와 악은 인간이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예기"에는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음악은 평화롭고 즐거우나 정치가
어지러운 나라의 음악은 원망스럽고 노엽다는 말도 있다.
또 음악을 가리켜 "덕의 꽃"이라고 정의한 귀절도 나온다.
이런 것을 보면 유교만큼 음악을 중시했던 종교도 없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은 사회의 일체화를 이루는 근원적
추진력이 된다는 사실을 옛 사람들도 이처럼 잘 알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사람들과 노래부르는 것을 즐겼고 순임금이 지은
현가 소악 등의 음악도 감상했으며 노나라 태사에게 음악이론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꾸는 데는 음악과 예법만한 것이 없다는
말도 남겼다.
그러나 이토록 음악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왕조의 음악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중의 감정과 전통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중의 감정과 전통을 무시하고 한문에 얽매인 시문과 중국제도를 따른
아악은 대중속에 파고들지 못했다.
대중은 유교식예법을 따랐지만 음악은 신라때부터 전승돼온 고유의 향악을
썼다.
그래서 예법이 우세한 가운데 결국 음악의 교화기능은 이상적으로
발휘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사회에서는 끊임없는 지식인들의 예법논쟁속에 위엄있고 긴장감을
지닌 선비의 모습이 부각되었지만 화락하고 온화한 선비의 본래 모습은
퇴색해 버렸다.
예법이 음악을 짓눌러버린 탓이다.
"음악이 지나치면 멋대로 놀아나고 예에 치우치면 뿔뿔이 흩어진다"는
옛말 처럼 예에 치우친 조선왕조 양반계층의 음악은 대중교화의 역할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고 백성들의 음악과 괴리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세종대왕처럼 우리식 악기를 만들고 악곡을 짓고 악보를 편찬시켜
음악으로 백성을 교화하려 했던 임금도 있었다.
선비중에서도 퇴계 이황같은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노래가사와 곡조가
음란하고 상스런 것을 탄식하면서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산십이곡"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노래의 광범한 보급과 생활화에 적극적으로 힘쓰지는 않았다.
또 고종때 김일부가 "정역"이라는 새로운 역학을 체계화하면서 "음 아 이
오 우"라는 오음만으로 영가를 부르고 무도에 힘썼던 것은 교화방법의
개혁안을 위한 시도였으나 그 역시 역부족이었다.
과거야 어찌됐든 오늘날 한국의 음악은 복잡하게 나뉘고 또 얽혀져 있다.
먼저 국악과 양악으로 나뉘고 국악은 정악과 민속악으로, 양악은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다시 나뉘어져 있다.
학계에서는 "한국음악"이니 "민족음악"이니 하는 논의도 있지만 실은 그
정체가 어떤 것인지조차 모호한 형편이다.
오늘날은 대중음악의 지대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구비로 전승된 판소리 시나위 산조 잡가 민요 농악 등
무엇인가 모자라는 음악으로 대접받던 민속악이 활기를 띄고 있다.
반대로 아락 가곡 가사 시조 등 이른바 정락은 한없이 움츠러 들고 있다.
그것들은 중국음악의 아류 아니면 "양반계급"의 전유물이고 민속악이야
말로 "서민층이 즐기던 진정한 우리음악"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
우리들에게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묘제례악을 제외하면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모든 아악곡들은
이미 향락화되어 버린 우리음악들이다.
정악이나 민속악이나 모두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악은 높은 교양을 갖췄던 지식인들이 갈고
다듬어 즐겁거나 슬픈 감정을 가능한 한 역제한 예술성이 강한 것이고,
민속악은 지역적 특징이 강하며 비교적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최대한 표출한
소박한 음악이라는 점이다.
"밥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는 말도 있듯 역시 대중성이 없으면
외면당하게 마련인 것이 요즘 세태인가 보다.
국안보다는 대접이 백번낫겠지만 이런 상황은 서양고전음악의 경우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와중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우리의 전통적 기탁이나 선율이 어떤
것인지 들어보지도 못한채 서양의 대중가요와 춤에 휩쓸려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매스 미디어는 아직 대중의 유일한 오락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TV는 오락전달에 가장 적합한 매체다.
방송은 전통문화를 옳게 전승하고 건전한 대중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으뜸가는 도구다.
또 방송은 인간개인은 물론 사회규범 문화형태까지도 변용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점에서 방송사들은 대중음악 일변도로 국민의 문화감성에 해를
입혀서는 안되고 깊이 있는 정신문화의 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다양한 질과 내용의 대중음악이 혼재 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상황이라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대중음악현상은 저질적으로 평준화된 대중음악의
획일화다.
전통명절을 맞으면 각 방송사들이 인심이라도 쓰듯 다투어 국악프로그램을
마련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한복을 차려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국악인들의 민요가락이 나오면 짜증스럽기만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음악이 있었나싶게 아악도 들려주고 가곡이나 가사
시조도 들려주었으면 한다.
이번 추석에는 민속악 뿐만 아니라 정악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