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가 높은게 어찌 통화당국만의 책임입니까"

고금리 이야기만 나오면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강변한다.

자신들이 잘한게 없다 하더라도 고금리의 주범으로 모는 게 매우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공급(은행)과 관리(통화당국)가 미숙한 점도 문제지만 뭐니뭐니해도
고금리의 가장 큰 요인은 수요(기업)에 있다"(이강남 한국은행조사제1부장)
는 생각도 한다.

따라서 만성적인 초과수요를 놔둔채 공급과 관리부문만 조정해봤자 금리는
다시 오름세를 탄다는게 금융권의 얘기다.

실제로 지난 4월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때 시장금리는 "단군이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연초만해도 연 13%대를 맴돌던 회사채 유통수익률(3년)이 연 10.4%까지
떨어져 혹시 "한자릿수 금리시대"가 오는게 아니냐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혹시"는 "역시"로 끝났다.

기업들의 운전자금수요가 살아나자 다시 연 12%대로 회귀해 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 4월 당시 나웅배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은 "저금리 드라이브"를
걸었다.

우선 은행 지급준비율을 2%포인트가량 낮췄다.

은행들에겐 수신금리 경쟁을 자제토록 밀어부쳤다.

고금리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신탁계정의 예금들도 축소했다.

그 결과가 단군이래 최저금리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나웅배금리"에 불과했다.

자금 시장의 수요측면은 가만히 둔채 공급부문의 치켜든 고개(고금리
요인)만 억지로 눌러앉힌 결과였다.

누르는 힘이 조금 약해지자 금리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이는 결국 기업들의 초과 자금수요가 진정되지 않는한 "금리의 국제수준"
은 요원하다는걸 보여준다.

고금리를 초래한 원인의 상당부분이 기업들에 있다는 얘기도 된다.

외국기업과 통계를 비교해 보면 확실히 그렇다.

지난해 국내기업들은 투자금액 1천원중 7백20원을 외부에서 빌려썼다.

이중 2백72원이 높은 금리를 물고 금융기관에서 차입한 돈이다.

그밖에 2백88원은 비록 자기신용(회사채나 유가증권 발행)으로
조달했다고는 하지만 금리를 부담하기는 마찬가지다.

1천원중 금리를 물지않은 "프리머니"는 2백80원에 불과했다.

반면 미국기업들은 투자금액 1천원중 1백10원만을 외부에서 빌려왔다.

일본기업과 대만기업은 각각 3백25원과 2백50원에 대해서만 이자를
부담했다.

국내기업이 경쟁국 기업보다 2~7배나 더 많이 남의 돈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금리부담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과도한 금리부담은 제품 가격에 얹혀져 그만큼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건 당연지사다.

종국적으론 기업들을 파국으로 내몬다.

그러나 이런 "빚잔치"는 기업의 파국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고금리구조를 다시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망하지 않으려면 외부자금을 더 많이 끌어 쓸 수 밖에 없고 자금 수요가
늘어나는 한 금리는 오르면 올랐지 떨어질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 90년대초 유화업계의 신.증설붐이 일었을 때다.

현대와 삼성의 NCC(나프타분해공장) 신규투자자금과 기존 LG 유공 한화의
이 증설투자자금(총 7조원)을 닥치는대로 끌어들여 "자금 공황"이 야기됐던
것이다.

"정말 돈장사하는 맛이 났지요.

시중 자금이 고갈돼 사채까지 끌어올 판이었습니다.

금리는 25%까지 치솟아 마진이 엄청났습니다"(D종금 K상무)

"유화업계 르네상스"가 최악의 고금리 지옥을 만든 것이다.

지난 94년말부터 올해초까지 계속된 "조선 르네상스"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업들도 할말이 없는건 아니다.

"그룹이 현상 유지에 만족할순 없다.

잘되는 사업도 언제 내리막길을 탈지 예측하기 힘든 판에 돈 되는 신규
사업을 일단 선점하는건 당연하다"(대우중공업 자금계획팀장).

"기업들이 차입금을 좋아하게 돼있다.

빚을 져도 가격만 보장되면 이윤이 남기 때문이다.

독과점체제의 고가격구조가 과잉 자금 수요의 원인이다"(H그룹 기조실
관계자).

핑계야 그럴듯하지만 기업의 몸집불리기식 경영은 금융시장에서 결코
두둔할 일이 아니다.

여유 있을 때 부채를 줄여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연구개발투자에 힘써야
한다.

우리와 성장률이 비슷한 대만이 한자릿수 금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기업들의 튼실한 재무구조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일본경제가 한창 어려울 무렵인 90년대초 신재무
전략인 "도요타 뱅크"를 제창했다.

단 하루라도 회사자금이 불필요하게 남아 있지 않도록 하자는게 골자였다.

그 결과 자기자본 비율을 60%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풍족한 자체자금으로 마음놓고 투자를 집행했음은 물론이다.

경기하강골이 깊어만 가는 요즘.

기업들도 이제는 고금리 해소만을 주장할게 아니라 "그룹뱅크창설"을
신중히 고려해야할 것 같다.

< 정리 = 심상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