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중순 경이었던가.

인사동 화랑들을 둘러보던 날.

나는 모처럼 좋은 가을빛에 내쳐 경복궁 뜨락까지 들어섰다.

가을이라 해도 늦더위가 좀처럼 가시지 않은 탓인지 나무들은 질긴
한여름의 빛을 덜어내지 못하고들 엉거주츰 서있는데,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이었을까.

피부에 닿아오는 가을의 대기는 이미 잔뜩 푸른 물이 들어 있었다.

평일 낮의 궁 안은 물 속처럼 투명하고 고요했다.

헌데 공중엔 지느러미같이 펄럭이는 것들이 있어 보니, "황제는 살아있다",
"한나라 황금보물전!".

온통 금색 붉은색의 깃발들이다.

전시장 안엔 커다란 유리상자가 둘, 황금옥의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의
모습이 생생하게 복원돼 있었다.

사후에도 내내 복귀영화를 누리리란 믿음에서라던가.

실로 이천개가 넘는 푸른빛의 반듯반듯한 옥조각들은 모두 0.3mm의
두께라는데 황금실로 정교하게 꿰매져 조명 아래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왠지 그들이 낮설지가 않으니.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릿아릿 아파오기 시작했다.

꿈에선듯 머언 전생에선 듯 그들을 어디서 본듯 했다.

풀릴듯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하나에 메달리듯이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시달렸다.

저 번쩍이는 텅 비인 갑옷들 뿐아니라 푸른 물속 같은 공기하며
울긋불긋하던 깃발들 신비스럽기까지 하던 그날의 모든 광경이 도대체
낯설지가 않았다.

아파트 현관 안에 들어서서 늘 그러듯이 베란다 쪽에 놓인 수족관으로
마악 눈길이 가는데 오오, 바로 너희들이로구나.

유리상자 속의 황제와 황후가.

조명 아래 찬란하던 저옥과 황금의 수의가!

비단잉어를 기른지 햇수로 십삼년째다.

희귀종이나 좋은 빛깔이 있다 하면 멀리라도 찾아가 구해다 놓았었다.

처음에 설치했던 수족관은 몇달이 안가 가득차 버리고 여덟자짜리 대형
수족관을 따로 더 들여놓아야 했다.

비단잉어에 관한 책을 사보면서 남편과 나는 밤마다 고운 무늬를 골랐다.

온몸 흰색에 은빛광택이 있는 너울너울 천사를 닮은 플레티나, 노오란
황금, 붉은 무늬의 흥백, 비늘이 하나도 없는 라인잉어, 붉은빛과 검정의
좌우 균형이 잡힌 삼색, 푸른빛 잔등에 배가 붉은 추취, 흑백사진과 같이
검은 무늬가 찍힌 백사와 흑사, 온몸비늘이 번쩍번쩍 비단옷같은 광택을
내는 금린, 머리위 붉은 무늬가 동그랗고 진한 단정까지 우리는 골고루
사들여 놓았었다.

새로 들어온 놈들은 며칠간 작은 수족관에 넣어두었다.

기생충이나 병에 감염돼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가장 흔한 것이 닻벌레(닻모양의 기생충)인데 지느러미에 자주 기생한다.

근지러워 못 견디는 잉어는 바윗돌이나 바닥의 자갈에도 드르르륵 요란스레
문지르고 다닌다.

나는 그럴때면 핀셋과 가나마이신 가구약 그리고 타월을 준비한다.

남편이 뜰채로 어렵사리 건져낸 놈을 나는 타월에 단단히 감싸쥔다.

고통으로 입이 딱벌어진 놈은 목구멍에서 끼억 꺽 소리를 낸다.

나는 놈의 지느러미에 박혀있는 눈에 보일듯 말듯 한 닻벌레를 솜씨있게
떼어내고는 재빨리 가나마이신을 발라준다.

물속에 다시 들어간 놈이 허덕거리며 다급히 호흡하는걸 보는건 여간
흐믓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기쁘기만 하던 그들이 해가 갈수록 왜 이리도 가슴 미어지는지...

잉어들과 나는 전생에 무슨 관계였을까?

우리집에 와 십년이상 된 잉어들도 아직 있다.

그들은 내 맘 속까지 둘여다본다.

먹이를 주면 요란스레 몸싸움하며 받아 먹으면서도 덤비인 동그란 눈들이
내 눈치를 살핀다.

그들 역시 기억하는 것이리라.

물 밖으로 나간 푸른 지느러미들을...

오늘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린다.

아침나절 내내 나는 잉어들을 마주보며 앉아 있다가 툴툴 털어버리듯
일어선다.

잉어들이 덩달아 일제히 이쪽을 향해 펄척인다.

꼬리치며 벙긋거리며 "엄마, 엄마..."

어떤 놈은 스프링같은 입을 주욱 죽늘이며 "줘어, 줘어..."

나는 짐짓 외면한 채 수족관 앞을 빠르게 지나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