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일-유럽시장 특파원 리포트 ]

뉴욕 : 박영배 특파원

한국상품이 해외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유명백화점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는
이미 진부한 얘기에 불과하다.

엔저 등 환률변동으로 인한 일시적 퇴보가 아니라 구조적인 경쟁력상실에
따른 결과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경제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미국 유럽 일본특파원들의 현지 보고를 통해 주요수출시장에서 대책없이
밀려나고있는 한국제품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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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뉴욕 메이시백화점을 방문한 국내 굴지 전자회사의 한영업사원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자사 전자제품을 메이시백화점에 전시하기 위해 그곳 담당자를 만나
흥정을 벌였으나 심드렁한 반응만을 얻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측은 거래를 트자는 영업사원의 제의를 면전에서 거절하기
어려웠던지 광고비를 분담해야 한다, 판촉비를 보조해야 한다는 등 이것저것
까다로운 조건을 붙였다.

한마디로 세계 유명 브랜드와 함께 한국제품을 내놓기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투였다.

그렇다고 소매유통체인에서 한국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것도
아니다.

과거 한국제품이 놓여있던 진열대에는 중국이나 동남아국가들의
제품들로 대체되어 있다.

고급품에도 저급품에도 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한때 달리는 외교관이라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자동차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소비자신뢰 조사기관인 J D파워나 소비자전문잡지인 컨슈머리포트지에
나오는 한국자동차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면이 훨씬 많다.

차량결함률의 경우 도요타의 렉서스는 100대당 0.5대인데 비해 현대차는
1.8대로 나와 있다.

결함률이 무려 4배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결함이 엔진등에 나타나는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트렁크나 차창 와이퍼등 사소한 부분이 조립라인에서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아서라는 얘기다.

경공업제품을 들여다 보면 더욱 한심해진다.

의류 신발 가방 봉제완구 할 것 없이 후발국들에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맨해튼거리의 상가에 그토록 쌓여있던 메이드 인 코리아는 자취를
감춰버린지 오래다.

중국산 인형, 인도네시아산 신발, 태국산 주방기기, 카리브해연안국가들의
의류등이 즐비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대미수출비중도 10년전에는 40%였으나 이제는 20%이하로
절반이상 뚝 떨어졌다.

올들어 7월까지의 수출실적만봐도 지난해 동기 대비 마이너스 일색이다.

석유화학제품(-17.8%) 섬유류(-10.7%), 신발(-32.1%) 금속제품(-13.1%)
자동차(-7.7%) 일반기계(-22.4%) 컬러TV(-44.2%) VTR(-45.7%)
음향기기(-24.0%)등 그 품목은 셀 수 없이 많다.

이같은 결과는 품질에 뒤지고 가격에 밀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산업이 구조조정기에 들어가 그 과정속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80년대처럼 가발이나 앨범등을 융단폭격식으로 퍼부어 승부를 거는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무역협회 워싱턴지부 이상직이사는 "무역이 줄어든다고 해서 좌절할
게 아니고 이럴때일수록 시장특성에 맞는 상품을 찾아내고 고부가가치
상품개발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요구된다는 얘기다.

쌍용의 미주본부 정영우사장은 현지화를 강조한다.

그는 "관리부문과 영업부문을 현지화해야 하고 사업구조를 현지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현지진출 역사가 100년이 넘는 일본상사들을 벤치마킹해야한다"고
조언한다.

일본상사들은 수출보다 투자와 금융조달에 주력하면서 사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한편 효성의 현지법인 박영일사장은 "미국시장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미국시장은 영원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며
"당장 물건 하나 더 파는 것 보다 그 파는 길을 뚫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수입시장이자 소비시장으로 경쟁의 최대
격전지이다.

미국의 연간 GDP규모는 6조7,000억달러로 이중 3분의2를 민간소비지출이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총상품 수입액은 7,000억달러였는데 이같은 규모는 독일의
두배, 일본이나 프랑스의 3배이다.

따라서 세계 모든 기업이 이곳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건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미국시장의 특성에 대한 연구 또한 보다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분석된 미국시장의 특성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있다.

첫째 다른 세계 어느 시장보다도 세분화가 이루어져 있다.

인종 성별 나이 지역 라이프스타일 교육수준등에 따라 소비성향이
현격히 다르다.

따라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공기총식 전략으로는 발붙이기 어려운
형편이다.

둘째 유통업체의 입김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화 되는 추세이기는 하나 미국은
특히 더하다.

60년대들어 월마트나 K-마트등 디스카운트 스토어가 전국적인 체인망을
형성하면서 상품유통의 일대 전환을 가져왔는데 최근 들어서는
프라이스클럽, 슈퍼체인 디스카운트 스토어등이 가격파괴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해 더욱 그 힘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제품의 가치를 따지는 소비시장이라는 점이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지금과 달리 실질 가계소득이 일정해 최고급품만을
선호한 경향이었으나 이제는 미국 중산층들도 제품가치 숭배자가 돼 품질이
양호한 제품을 보다 싼 값에 구입하려 애쓰는 추세이다.

넷째 급속한 기술개발로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급속히 짧아지고 있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한발 더 앞서 나가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은 해마다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장특성에 발맞추어 나가면서 동시에 후발국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우리 기업들로선 이중 삼중의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후진국들의 발빠른 움직임을 보면 멕시코의 경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 발효된 후 페소화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약진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올 상반기중 자동차는 57.2%가 늘었고 기계류 22.4%, 가구류도 26.5%나
증가했다.

중국도 전자 완구 신발 기계류등에 10%이상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사양업종은 있어도 사양기업은 없다는 대만 역시 컴퓨터 반도체 전자등
주력품목에서 우리와 달리 증가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 업체들이 고전하는 반도체분야에서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각각 32.6% 14.7%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경쟁국들의 홍보 또한 우리상품의 이미지를 상대적으로 깎아 내리고
있다.

중국의 경우 미국 현지에 맞는 전문가를 채용해 신문 방송등 각종
토론회나 회의에 내보내고 있다.

대만도 혁신이라는 "이노베이션"과 가치라는 "밸류"를 합성한 신조어
"이노밸류(INNOVALUE)"의 가치아래 대대적인 국가홍보에 나서고 있다.

경쟁국들의 전시회참가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미국은 전시회가 마케팅의 필수요소로 정착된 시장인데 연간 5,000여회의
크고 작은 전시회가 개최되고 국제전시회만도 연간 450여회가 열리고 있다.

뉴욕에서의 전시회만도 200여회가 넘는다.

이들 국가는 주요 유통지역 거점별 품목별로 마련되는 전시회에 눈을
돌려 활발한 상담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KOTRA가 주관하는 선물용품전시회등 8회가 고작이다.

우리나라는 빠른 경제개발 덕에 무역고를 높이고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기는 쾌거를 이루어 후발국들의 부러움을 사왔다.

그러나 이 부러움이 언제 경멸로 돌변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낙관하기엔 늦었지만 그렇다고 아직 낙담하기엔 이른 지금 품질 기술
마케팅 의식등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는 한 상사원의 지적이
경구처럼 들린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