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내가겪은 '김정일의 북한'..현성일 <전 북한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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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일 < 전 북한 주잠비아 외교관 >
대북정책 수립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얘기한다.
나는 북한 평양에서 출생, 평양 인민학교 고등중학교 과정 등 엘리트
교육과정을 밟았다.
간부(차관급 이상) 자녀들을 위한 남산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과 김평일 등이 모두 이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이 학교는 70년대말 김정일 지시로 폭파, 해체됐다.
북한은 김정일사적을 성지로 취급하지만 이 학교만큼은 김정일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이복동생 김평일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이유로 제거한 것이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뒤 영어교원(교수)으로 8년간 근무했다.
이어 외교부로 옮겨 본부에서 4년 근무한 뒤 잠비아 주재 외교관으로
나갔다.
이런 경력으로 인해 최근 북한 일반주민들이 겪고 있는 식량난에 대해서는
직접 고통을 체험한 사람들에 비해 생생하게 얘기하기 어렵지만 아는대로
밝히고자 한다.
북한의 경제난 식량난은 70년대말부터 시작돼 80년대초부터 심각해진
것이다.
최근의 일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경제난 때문에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70년대 중반 이미 김일성 후계자로 자리를 잡은 김정일이 북한체제를
강력히 틀어지고 있다.
일반주민들도 김정일은 김일성과 같은 인물이자 후계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군.정사업은 김정일이 틀어쥐고 한다는 것은 80년대초부터 기정사실화
됐다.
서방의 붕괴론은 북한을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다.
실례로 외교부가 대외정책안을 작성할 때에도 80년대 중반까지는 김일성
방침이 필요했으나 그 이후에는 김정일방침이면 됐다.
인민무력부 등 다른 모든 기관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에게 모든 보고문건이 집중됐다.
김정일이 보고 결심하기 어려운 것만 김일성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북한에서 일반주민들조차 "위대한 수령님은 우리 이렇게 사는 것 모르실
거다"라고 얘기했다.
외교부도 김일성이 외국원수와 만날때 미리 알아야 할 사항 정도를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북한주민들은 항상 미국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긴장해 살아야 한다고
교양받고 있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은 생활고를 결코 김정일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발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이 과학기술에 투자하지 않고 문화예술밖에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술에서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 김정일에게는 예술이 요람이다.
북한주민들은 이를 두고 "깽깽이 세상"이라고 한다.
김일성도 이런 풍조를 알았던 것 같다.
이런 일화가 있다.
김일성은 85년에 기차를 타고 소련과 동유럽을 한달간 순방했다.
이때 김일성은 바깥세상이 많이 발전했다고 느꼈다.
경제와 과학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일성이 평양으로 돌아오자 아이들이 꽃다발을 안겨줬다.
김일성이 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커서 뭐가 되겠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예술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일성은 이때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88년 공화국 창건 40돌 행사로 개최한 "5천명 대공연"에서 김정일이
참가한 5,000명에게 컬러TV를 하나씩 줬다.
아이들도 있었는데 가족이 한꺼번에 참가한 집의 경우 받은 TV가 3~4대나
됐다.
이때 주민들이 많이 욕을 했다.
과학자들이 몇십년 고생해서 발명해도 TV 하나 안주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기쁨조"에게도 오메가시계 영웅칭호 등을 마구 주는데 일반주민들도
다 안다.
7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의 개인비자금이라 할수 있는 "당자금"이 본격적
으로 조성됐다.
그 전의 당자금에는 외화가 없었고 액수도 많지 않았다.
김정일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당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당재정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재정경리부 39호실 산하에 대성총국 대성은행 등 별의별
것을 다 만들었다.
대외무역을 담당한다는 무역부 산하 무역은행금고는 텅텅 비었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했던 90년대초 정무원총리가 유엔에 가려할때
대표단 여비에 문제가 생겼다.
총리 직속의 무역은행은 돈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에게 얘기하자 그는 39호실에 지시, 당자금을 풀어 해결했다.
마그네사이트 철 시멘트 아연 수산물 등 이런 게 외화원인데 광산 등이
모두 39호실 것이다.
중앙당 당자금은 김정일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비자금이다.
명절때 주는 사탕과자도 이 당자금에서 나온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생산계획을 짜지만 당이 중간에 끼여들면 계획은
망가진다.
북한은 계획경제도 시장경제도 아니다.
당이 틀어쥐고 있는 이상한 경제다.
이런 불만속에서도 주민들에게는 한국에 대한 거부감, 사회주의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다.
사상교양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거의 매일 사회주의 붕괴후 동유럽의 비참한 현실을 게재하고
있다.
소련의 유명한 배우가 매춘부로 전락했으며 유명한 과학자나 외교관이
거지가 됐다고 소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층들은 죽으나 사나 체제를 고수해야 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남쪽에 지게 되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한다.
한국쪽에서는 북한붕괴시 난민들이 떼를 지어 남으로 온다고 우려하고
있으나 이런 사정 때문에 주민들은 도망가도 중국이나 러시아로 가지
남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주민들은 바깥세상을 너무 모른다.
중국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해서 물건이 넘치고 잘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한국이 중국보다 잘 산다는 사실은 모른다.
중국에 대한 환상은 많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못살 곳"이라고 믿고 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거나 준비가 돼 있는 지도부가 있어야 통일을
얘기할수 있지 김정일이 있는 한은 통일에는 전쟁 외에 없다.
김정일이 92년 군대회 참가자와 기념촬영을 한 일이 있다.
김정일이 꽃다발을 준 병사에게 "싸움을 하면 이길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병사는 "무조건 이긴다"고 답했다.
"한국전쟁 때처럼 후퇴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병사가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자 김정일은 "그래도 싸워봐야
아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병사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자 옆의 간부가 답답한 나머지 "우리 인민군은
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는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이때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안다는 듯 흡족해 했다고 한다.
너죽고 나살자는 식이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핵무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김정일은 지금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대미외교를 노린다.
대미외교가 풀려야 일본 유럽과도 관계가 풀릴 것이다.
북한은 봉쇄가 풀리고 나진.선봉지대에 투자가 이뤄지면 경제가 회생될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김정일이 대미외교에 필사적인 이유다.
남한기업이 100개 1,000개 들어가도 한국의 의도대로 안된다.
거꾸로 인질이 될 것이다.
북한에 한국은 어느 때고 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북한은 현대 삼성 등이 세계적인 기업이라고 알고 있지만 "발전시켜라
언젠가 우리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만이 중국에 많이 투자했다.
그러나 중국이 힘이 강해지자 대만을 때려잡자고 한다.
마찬가지다.
북한을 키워주면 나중에 남한을 잡아먹자고 할 것이다.
절대 고맙다고 하지 않는다.
북한의 통일은 전쟁이다.
외교관들은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10년내 통일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때 통일은 남침을 통해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은 이미 김일성을 승계했다.
형식만 남았을 뿐이다.
북한 최고의 행사로 열 수 있는 분위기가 안됐을 뿐이다.
김정일에게는 큰 업적도 없다.
북미수교라든가 평화협정 체결이라든가 하는 "뜻깊은" 업적이 있어야
한다.
승계지연 이유로 북한에서 선전하듯이 김일성에 대한 "효도"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북에서는 효도가 중요하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일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승계행사를 해 굳이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군부의 충성은 절대적이다.
서방의 "북한 군부가 김정일을 제압한다"식의 일은 있을 수 없다.
무장공비를 내려보낸 것도 강온파간 대결에 의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우스운 생각이다.
북한은 그렇게 보이려 했을뿐이다.
모든 것은 김정일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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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일씨는 주잠비아 북한대사관에 근무중이던 지난 1월말 한국
현지공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앞의 강연 내용은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2일 창간32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개최한 강연회에 현씨가 참석, 밝힌 것으로 우리측 일부 전문가와
서방권의 시각과는 판이한 대북관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정리=허귀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7일자).
대북정책 수립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얘기한다.
나는 북한 평양에서 출생, 평양 인민학교 고등중학교 과정 등 엘리트
교육과정을 밟았다.
간부(차관급 이상) 자녀들을 위한 남산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과 김평일 등이 모두 이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이 학교는 70년대말 김정일 지시로 폭파, 해체됐다.
북한은 김정일사적을 성지로 취급하지만 이 학교만큼은 김정일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이복동생 김평일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이유로 제거한 것이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뒤 영어교원(교수)으로 8년간 근무했다.
이어 외교부로 옮겨 본부에서 4년 근무한 뒤 잠비아 주재 외교관으로
나갔다.
이런 경력으로 인해 최근 북한 일반주민들이 겪고 있는 식량난에 대해서는
직접 고통을 체험한 사람들에 비해 생생하게 얘기하기 어렵지만 아는대로
밝히고자 한다.
북한의 경제난 식량난은 70년대말부터 시작돼 80년대초부터 심각해진
것이다.
최근의 일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경제난 때문에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70년대 중반 이미 김일성 후계자로 자리를 잡은 김정일이 북한체제를
강력히 틀어지고 있다.
일반주민들도 김정일은 김일성과 같은 인물이자 후계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군.정사업은 김정일이 틀어쥐고 한다는 것은 80년대초부터 기정사실화
됐다.
서방의 붕괴론은 북한을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다.
실례로 외교부가 대외정책안을 작성할 때에도 80년대 중반까지는 김일성
방침이 필요했으나 그 이후에는 김정일방침이면 됐다.
인민무력부 등 다른 모든 기관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에게 모든 보고문건이 집중됐다.
김정일이 보고 결심하기 어려운 것만 김일성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북한에서 일반주민들조차 "위대한 수령님은 우리 이렇게 사는 것 모르실
거다"라고 얘기했다.
외교부도 김일성이 외국원수와 만날때 미리 알아야 할 사항 정도를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북한주민들은 항상 미국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긴장해 살아야 한다고
교양받고 있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은 생활고를 결코 김정일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발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이 과학기술에 투자하지 않고 문화예술밖에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술에서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 김정일에게는 예술이 요람이다.
북한주민들은 이를 두고 "깽깽이 세상"이라고 한다.
김일성도 이런 풍조를 알았던 것 같다.
이런 일화가 있다.
김일성은 85년에 기차를 타고 소련과 동유럽을 한달간 순방했다.
이때 김일성은 바깥세상이 많이 발전했다고 느꼈다.
경제와 과학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일성이 평양으로 돌아오자 아이들이 꽃다발을 안겨줬다.
김일성이 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커서 뭐가 되겠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예술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일성은 이때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88년 공화국 창건 40돌 행사로 개최한 "5천명 대공연"에서 김정일이
참가한 5,000명에게 컬러TV를 하나씩 줬다.
아이들도 있었는데 가족이 한꺼번에 참가한 집의 경우 받은 TV가 3~4대나
됐다.
이때 주민들이 많이 욕을 했다.
과학자들이 몇십년 고생해서 발명해도 TV 하나 안주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기쁨조"에게도 오메가시계 영웅칭호 등을 마구 주는데 일반주민들도
다 안다.
7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의 개인비자금이라 할수 있는 "당자금"이 본격적
으로 조성됐다.
그 전의 당자금에는 외화가 없었고 액수도 많지 않았다.
김정일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당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당재정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재정경리부 39호실 산하에 대성총국 대성은행 등 별의별
것을 다 만들었다.
대외무역을 담당한다는 무역부 산하 무역은행금고는 텅텅 비었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했던 90년대초 정무원총리가 유엔에 가려할때
대표단 여비에 문제가 생겼다.
총리 직속의 무역은행은 돈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에게 얘기하자 그는 39호실에 지시, 당자금을 풀어 해결했다.
마그네사이트 철 시멘트 아연 수산물 등 이런 게 외화원인데 광산 등이
모두 39호실 것이다.
중앙당 당자금은 김정일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비자금이다.
명절때 주는 사탕과자도 이 당자금에서 나온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생산계획을 짜지만 당이 중간에 끼여들면 계획은
망가진다.
북한은 계획경제도 시장경제도 아니다.
당이 틀어쥐고 있는 이상한 경제다.
이런 불만속에서도 주민들에게는 한국에 대한 거부감, 사회주의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다.
사상교양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거의 매일 사회주의 붕괴후 동유럽의 비참한 현실을 게재하고
있다.
소련의 유명한 배우가 매춘부로 전락했으며 유명한 과학자나 외교관이
거지가 됐다고 소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층들은 죽으나 사나 체제를 고수해야 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남쪽에 지게 되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한다.
한국쪽에서는 북한붕괴시 난민들이 떼를 지어 남으로 온다고 우려하고
있으나 이런 사정 때문에 주민들은 도망가도 중국이나 러시아로 가지
남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주민들은 바깥세상을 너무 모른다.
중국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해서 물건이 넘치고 잘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한국이 중국보다 잘 산다는 사실은 모른다.
중국에 대한 환상은 많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못살 곳"이라고 믿고 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거나 준비가 돼 있는 지도부가 있어야 통일을
얘기할수 있지 김정일이 있는 한은 통일에는 전쟁 외에 없다.
김정일이 92년 군대회 참가자와 기념촬영을 한 일이 있다.
김정일이 꽃다발을 준 병사에게 "싸움을 하면 이길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병사는 "무조건 이긴다"고 답했다.
"한국전쟁 때처럼 후퇴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병사가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자 김정일은 "그래도 싸워봐야
아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병사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자 옆의 간부가 답답한 나머지 "우리 인민군은
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는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이때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안다는 듯 흡족해 했다고 한다.
너죽고 나살자는 식이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핵무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김정일은 지금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대미외교를 노린다.
대미외교가 풀려야 일본 유럽과도 관계가 풀릴 것이다.
북한은 봉쇄가 풀리고 나진.선봉지대에 투자가 이뤄지면 경제가 회생될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김정일이 대미외교에 필사적인 이유다.
남한기업이 100개 1,000개 들어가도 한국의 의도대로 안된다.
거꾸로 인질이 될 것이다.
북한에 한국은 어느 때고 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북한은 현대 삼성 등이 세계적인 기업이라고 알고 있지만 "발전시켜라
언젠가 우리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만이 중국에 많이 투자했다.
그러나 중국이 힘이 강해지자 대만을 때려잡자고 한다.
마찬가지다.
북한을 키워주면 나중에 남한을 잡아먹자고 할 것이다.
절대 고맙다고 하지 않는다.
북한의 통일은 전쟁이다.
외교관들은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10년내 통일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때 통일은 남침을 통해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은 이미 김일성을 승계했다.
형식만 남았을 뿐이다.
북한 최고의 행사로 열 수 있는 분위기가 안됐을 뿐이다.
김정일에게는 큰 업적도 없다.
북미수교라든가 평화협정 체결이라든가 하는 "뜻깊은" 업적이 있어야
한다.
승계지연 이유로 북한에서 선전하듯이 김일성에 대한 "효도"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북에서는 효도가 중요하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일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승계행사를 해 굳이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군부의 충성은 절대적이다.
서방의 "북한 군부가 김정일을 제압한다"식의 일은 있을 수 없다.
무장공비를 내려보낸 것도 강온파간 대결에 의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우스운 생각이다.
북한은 그렇게 보이려 했을뿐이다.
모든 것은 김정일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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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일씨는 주잠비아 북한대사관에 근무중이던 지난 1월말 한국
현지공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앞의 강연 내용은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2일 창간32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개최한 강연회에 현씨가 참석, 밝힌 것으로 우리측 일부 전문가와
서방권의 시각과는 판이한 대북관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정리=허귀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