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개의 명함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중략)
굳게 뚜껑이 닫힌 만년필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말만 던지고 10년이
지난 드라마처럼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사무적인 착상에 단순한 집착만을 요구받으며.
우리는 살아가니까."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천지인 집에서)

노랫말을 들으면 뜨끔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마치 내 얘기같은" 직장인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래를 듣자면 현실의 삭막한 삶을 극복하려는 무언의 메시지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좋은 노랫말이다.

그러나 노랫말만 듣고 이 음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는 힘들다.

주인공들을 찾아가 봤다.

연남동 홍대뒤쪽 이면도로의 한 카센터빌딩.

이곳 지하에서는 지금 제3세대민중음악을 자처하고 나선 5명의 젊은
로커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소외되고 불행한 현대인들의 삶을 치유할 "천지인 2집"앨범발간을 위해
마무리작업에 한창이다.

3평 남짓한 연습실 공간과 일상에 젖은 연남동거리는 지금 이들이 내뿜는
강력한 비트음으로 후끈거리고 있다.

천지인은 한글의 제자원리이자 만민평등을 외쳤던 동학사상의 골자다.

그러나 요즘 대학가에선 한창 뜨는 인기 "록그룹"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이들은 좋은 노랫말과 실험성있는 무대매너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천지인은 음악적 성향이나 저력보다는 "운동권출신 록그룹"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93년 처음 콘서트를 가졌을때 나온 평을 보면 "유명해질 수 밖에
없었던"이유를 알 수 있다.

"대학생들이 이젠 완전히 맛이 갔군.

운동권에 하필이면 웬 록이람"

"서구 자본주의의 폐단을 그대로 물려받은 식민문화의 꽃 ''록음악''.

이제 대학 캠퍼스를 강타한다"는 식의 우려로부터 "민중음악의 한
조류라기 보다는 한번 나왔다 금세 사라지는 일과성으로 봐야한다"는
관망론까지 갖가지 비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신선하다''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이 좋다''는 평도 만만찮게
나와 천지인을 둘러싼 평가는 극과 극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연히 천지인은 운동권내부와 이를 지켜보는 대학관계자 음악인사이에서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천지인은 외부의 이러한 평가를 초탈한 듯 여전히
자신들만의 음악적영역을 구축해 가고있다.

''고집있는 프로''를 자처하는 ''천지인'' 다섯이 있기 때문이다.

굵직한 팔을 무기로 강력한 리듬을 내고 있는 드러머 정석원씨(25).

''강력한 사운드를 위한 강력한 힘''이 그의 모토다.

건반의 김정은씨(26)는 ''때론 강력하고 때론 부드러운''곡들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베이스의 박우진씨(28)도 아침마다 밤새 만든 곡들을 들고 연습실에
내려오는부지런파.

''고집센'' 이상혁씨(25)는 록의 정통성 회복을 주장하는 기타리스트다.

그는 ''한국적 록''보다는 록이 갖고 있는 본래의 ''젊음과 저항성''을
되찾는게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보컬을 맡고 있는 맏형 유재민씨(28).

그의 독특한 보이스는 천지인의 색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들의 음악은 관계자들로부터 열정적이고 따뜻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청소부 김씨 그를 만날때''에서는 소외된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열사가 전사에게''에서는 기존제도의 허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청계천 8가''에서는 산업사회를 시니컬하게 그려내고 있다.

천지인은 2집에서는 이같은 내용을 심화시키고 장르도 소프트에서
하드록까지 다양화할 예정이다.

상업주의와 표절이 횡행하는 대중음악계에서 분명한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록그룹 ''천지인''.

현재 이들은 서정적 저항곡들로 대표되는 ''김민기풍''의 70년대와 행진곡.

포크풍의 80년대 대학가의 음악을 이어갈 가장 강력한 팀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들의 음악세계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 지 주목되고 있다.

< 박수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