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업체가 획기적인 기술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개발했다고
칩시다.

세계시장엔 미국업체 상품이 먼저 나와요.

한국에선 2년 걸려야 세워지는 공장이 미국에선 다섯달 밖에 안걸리니
그럴 수 밖에 없지요.

기술을 생산으로 연결하는데 1년6개월을 밑져야 하는 한국업체는
원천적으로 지게 돼 있는 셈입니다"(전경련 관계자).

한국에선 공장을 운영하기도 힘들지만 짓는 건 더 어렵다.

공장 하나 세우는 데 필요한 서류는 2백28가지나 된다(전경련).

미국(23가지)보다 10배나 많다.

이 서류들을 36개 기관에 제출하고 56단계의 인허가 심사를 받아야 한다.

절차가 복잡하다 보니 설립 허가에서 준공까지 7백31일이나 걸린다.

반면에 미국에선 1백40일이면 공장이 쌩쌩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러니 한국에서 제조업을 하고 싶은 의욕이 날리가 없다.

공장 짓기를 힘들게 만드는 주범은 과다한 규제다.

공장설립이라는 말에 이런 저런 이유로 한 발씩 걸쳐 놓은 법만해도
44개나 된다.

"공장하나 짓는데 도장 1천개를 찍어야 한다"(이건희 삼성그룹회장)는
불만이 나올만도 하다.

공장을 세우기가 이처럼 힘들다 보니 아예 법을 무시하는 위법사업자도
양산되고 있다.

전국에서 등록하지 못하지 않고 가동하고 있는 "불법공장"은 95년말 현재
5만3천8백39개나 된다(통상산업부).

국내 전체 공장중 45.9%에 달하는 공장이 위법운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안된다고만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사업을 걷어치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박철현.부천소재 봉재업체 사장).

정책에 규제만 있지 대안이 없다는 항변이다.

아예 공장을 지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원초적" 문제로 공장을 세우기
전부터 "진"이 빠지는 기업들도 한국에선 탄생한다.

반도체 공장 신증설문제로 2년째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삼성전자와
현대전자가 이에 해당한다.

현행 수도권 정비계획법은 기흥공장(삼성)과 이천공장(현대)을 각각
성장억제권과 자연보호권으로 지정해 공장 신증설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반도체사업의 특성상 매년 공장을 지어야 하는 이들업체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일본 경쟁업체의 공장은 계속 새로 생기고 있는데 움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장이 없어서 일본에 추월을 허용할 판"(반도체
산업협회 김치락부회장)이라는 걱정도 나오고 있다.

반면 정부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공장신증설을 허용해야한다는 통상산업부 행정쇄신위원회의 주장과 그럴수
없다는 건설교통부는 2년 넘게 입씨름만 하고 있다.

이 와중에 멍드는 것은 생산을 못하는 기업뿐이다.

물론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는 인구도 분산해야 하고 녹지도 보호해야 한다.

또 "망국병"이라 불리는 부동산투기를 막아야 한다는데 이론이 없다.

그러나 "안된다 일변도 정책"은 그 손해가 고스란히 기업에, 그리고 우리
경제에 돌아온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해 3백억원을 들여 지방에 공장을 세웠는데 법령이 자주 바뀌다보니
인허가가 빨리 안나와 준공이 계획보다 한달 늦어졌다.

이 한달 때문에 28억원이나 손해봤다"(LG그룹 회장실 K이사).

인건비(5천만원) 금융비(3천만원) 매출감소손실(24억원) 등으로 한달만에
총 공사비의 10%를 날린 셈이다.

"지금은 초싸움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공장을 짓는데 시간을 몇년을 보내면서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가질 수는
없는 일"(현대전자 기획실 C이사)이란 지적이다.

예로부터 나라의 정책에서 중요한 것중 하나는 치수였다.

치수의 핵심은 둑을 쌓는게 아니라 물길을 어떻게 내느냐이다.

물이 흐를 곳이 없는데 둑만 쌓으면 결국 물은 넘쳐 난리가 날 수 밖에
없다.

규제로 얽어매고 또 허가도장을 받다가 정작 공장 세울 시간을 놓치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난리의 한가운데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 정리 = 조주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