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창간32돌] 통일대비 : (특별기고) 통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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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시대로 가는 길 ]
김학준 < 단국대 이사장 >
한반도의 통일이 가깝게 다가왔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렇게 말하게 된 배경에는 대체로 다음 세가지 요인들이 깔려 있다.
첫째는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공산정권의 전면붕괴로 상징되는 마르크시즘.
레닌이즘의 세계적 수준에서의 몰락이다.
이 역사적 대전환의 물결속에서 동독이라는 국가 자체가 소멸되고 서독에
흡수됨으로써 독일의 통일이 성취되자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붕괴 역시
임박했으며 대한민국에 의한 북한 흡수통일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둘째는 김일성의 사망이다.
지난 94년 7월의 김일성 사망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주요한 걸림돌이
마침내 제거됐다는 믿음을 널리 심어주게 됐다.
김일성의 사망은 또 북한의 붕괴를 알리는 징후로도 풀이됐다.
김일성의 계승자인 김정일의 건강이상설과 김정일 집안내부에서의 권력
투쟁설 등이 김정일의 공식적 권력승계 지연과 겹치면서, 게다가 식량위기로
요약되는 북한의 경제적 파탄이 노출되면서 북한이 결국 망할 것이라는
인상을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셋째는 20세기의 황혼이 짙어가면서 21세기의 여명이 나타나는 세기적
전환이다.
앞의 두가지 요인들에 이 세기적 전환이 겹쳐지면서 사람들은 21세기초가
되면 북한이 지도위에서 사라지고 통일된 국가가 한반도위에 서리라는
낙관적 발상을 갖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가지 요인들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통일 임박론이
확산됐다.
그래서 통일에 대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 과연 통일은 임박했는가.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이제 상식처럼 되어버린 통일임박론, 또는 만일
그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다면 통일가시권론으로 표현될수 있는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낙관적 통념에 대해 심각히 따져 보고자 한다.
필자가 판단하기로 한반도 통일의 외부적 여건은 지난 시대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
확실히 공산주의의 붕괴와 그리고 그것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냉전구조의
와해는 동북아시아에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 상징적인 보기로 우선 러시아와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대하는 새로운
자세에서 찾을수 있다.
80년대 말까지 북한만을 승인하고 대한민국을 부인했던 이 두나라가
오늘날에는 대한민국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의 우호협력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
그 상징적인 보기는 미국과 일본이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자세
에서도 찾게 된다.
북한의 존재를 외교적 형식에서 부인해 온 미국이 북한과의 핵협상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적지 않게 개선시켜 온 것이다.
일본의 속도는 늦지만 그래도 북한과의 수교협상을 포기하지 않은채
미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 개선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북한의 결심이 내려지기만 하면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
또는 공식관계 수립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이른바
한반도 주변 4강의 남북한 동시수교가 앞으로 2~3년안에 실현될 것이다.
확실히 국제적 냉전의 마지막 외로운 섬인 한반도 주변에도 봄은 찾아
오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의 내부적 환경은 뜻밖에도 개선의 방향보다는 악화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게 된 1차적인 책임의 소재지를 따진다면 아무래도 북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92년 2월에 발효한 "남북 기본합의서"를 사실상 파기시킨채
대화노선을 버리고 대결노선을 걸어 왔던 것이다.
93년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을 계기로 한 핵공갈외교, 북한의
식량난을 덜어주기 위해 쌀을 싣고 원산항에 도착한 남쪽 선박의 억류,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지난 9월에 저질러진 강원도 지역으로의 무장공비
침투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북한의 대결노선은 새삼 강조할 필요없이 세계적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다.
세계가 화해와 협조의 큰 물결을 확산시키고 있는 이때 북한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에 대해 적대적 행위를 거듭하는 것은 분명히
반민족적일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우리 대한민국에는 책임이 없는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
우리로서는 대결 노선을 피했고 대화노선을 추진해 왔으며 "남북 기본
합의서"에 입각해 평화통일의 길을 걷고자 노력해 왔음이 사실이다.
더구나 북한을 상대로 동포애를 발휘해 쌀을 보내 주고 여러가지 물품을
보내 줬다.
크게 보아 우리는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정부와 정당들의 언행에 자극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정부 스스로도 때때로 북한의 조기 붕괴를 공언하면서 흡수통일을
강조한 것은 슬기롭지 못했다고 하겠다.
이 대목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한번 중간 정리하기로 하자.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수 있다.
"한반도 통일의 한반도 외부적 환경은 크게 개선되고 있음에 반해 한반도
내부적 환경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명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한반도 통일에 진전이 보이지 않는 1차적 책임이
주변 열강에 있다기 보다는 남과 북의 한민족에게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지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반도의 분단구조는 2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국제정치적 성격과 내쟁적 성격이 그것이다.
국제적 권력정치에 희생이 되어 분단된 측면이 있는가 하면 민족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져 분단된 측면도 있고, 이 두 측면이 뒤얽히면서 분단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음이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이제 국제정치적 멍에는 꽤 많이 풀어지고
있음에 반해 내쟁적 멍에는 오히려 더욱 더 우리 한민족 전체의 목을 옥죄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다.
내쟁적 멍에를 우리 스스로 풀지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탓을 하겠는가.
다시 강조하거니와 필자는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돼 악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면
한반도에는 통일이 오기에 앞서 "확대된 내쟁"이 빚어내는 큰 규모의
유혈사태가 올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위험한 대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최근의 남북한 관계가 그것을 예고하지 않는가.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보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참으로 끔찍한 일이어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렵지만 옛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
연방에서 몇해동안 벌어진 내전을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지역의 상황은 소수민족들 사이의 갈등에 종교적 갈등이 얽혔기에
남북한 대결 상황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들이 냉전적 대결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으로 들어감
으로써 비강대국에 대한 냉전적 통제력을 잃게 되자 비강대국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내쟁에, 그리고 마침내 내전에 몰입하게 됐다는 사실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주는 교훈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9월에 저질러진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만해도 그렇다.
그것은 남북한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서는, 특히 주변 열강의 제동장치가
말을 듣지않는 경우에는 내전의 상황으로 악화될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때 국내의 몇몇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한반도 상황이 앞으로
독일형으로 가기보다는 유고슬라비아형으로 갈수도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
대비하는 시나리오도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이처럼 내쟁적 성격을 부추기고 있는가.
어째서 남과 북은 국제적 화해와 협력의 물결에 올라 타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싸우려고 하는가.
지금 이 질문은 남쪽에 대해서보다는 1차적으로 북쪽을 향해 던져지게
되는데, 간단히 묻건대 북한은 어째서 이다지도 싸움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대답은 별로 어렵지 않다.
남과 북 모두 "내주도 아래서의 통일, 내가 너를 흡수하는 방식 아래서의
통일"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과 반목의 불꽃이 거세게 튀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내가 너를 흡수하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 흡수당하고 만다"
는 절박감이 남북한 관계를 적대적 대결관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꼭 강조해야 할 점은 그 적대적 대결성에 있어 북쪽이
남쪽에 비해 훨씬 거세다는 사실이다.
남쪽은 "내가 너를 흡수하지 못해도 괜찮다.
네가 나를 흡수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굳이 흡수하려 하지
않겠다"는 선으로까지는 가 있다.
그것은 남쪽이 "통일을 일단 연기하더라도 전쟁은 회피해야 하겠고 너와
평화적으로 공존할 뜻이 있다"는 정책을 최소한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한의 의도는 전혀 다르다.
90년대 이후 북한은 체제 붕괴의 심각한 위기감에 젖어 있다.
국제정세의 변화는 북한을 국제적으로 크게 고립시켰다.
대한민국의 경제력 성장은 참으로 겁이 날 정도이다.
북한은 이렇게 가다가는 북한이 붕괴해 남쪽에 흡수되고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이 두려움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 마침내 국제적으로 널리 공인되게
된 북한의 식량위기이다.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 구조적 식량위기, 내년이면 더욱
악화될 이 만성적 식량위기는 결국 북한을 안으로부터 폭발시키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아무리 북한이 잘 통제된 사회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북한주민들이 굶주림에
익숙해 있다고 할지라도 이 혹심한 식량위기가 앞으로 2~3년 더 계속된다면
적지 않은 수의 서방 전문가들이 예측하듯 북한은 내부 폭발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
북한은 체제붕괴의 공포심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버렸다.
수십년동안 북한을 그 지독한 어려움속에서도 지탱시켜준 요소는
"주체의 나라"에 대한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국제적 거지"의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다.
자존심의 손상과 공포심의 증대는 사람을 비이성적이면서 폭력적으로
이끌게 된다.
북한이 최근 몇해 사이에 보여준 대결 지향적이면서 공격지향적인
대외행태의 뿌리에는 그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 점이 우리 대한민국이 깊이 고려해야 할 점이다.
쉽게 말해 독이 오를대로 올라서 막 갈수 있는 북한을 잘 다뤄야 한다.
강하게도 다뤄야 하고 유하게도 다뤄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만 다뤄서는 결코 슬기롭지 못하다.
이와 동시에 우리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대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잘못된 부분들은 과감히 고쳐야 하며 잘해온 부분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부추겨야 한다.
이점과 관련해 대한민국은 통일문제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북한이 동독이 아니듯 대한민국은 서독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지난날의 서독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잘사는 선진
민주복지국가로 발전시키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북한이 마음속으로 대한민국을 부러워하게끔, 대한민국으로의
자발적인 합류를 바라게끔 유도해야 한다.
통일보다도 평화가 확고히 뿌리내리는 쪽으로 힘을 써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구조가 성립되게 하면 남과 북사이에 통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아 올 것이다.
통일을 준비하려거든 평화를 먼저 준비하자.
-----------------------------------------------------------------------
[[[ 약력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피츠버그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12대 국회의원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겸 대변인
<>저서 : ''한국문제와 국제정치''
''러시아 혁명사''
''북한 50년사'' 등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4일자).
김학준 < 단국대 이사장 >
한반도의 통일이 가깝게 다가왔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렇게 말하게 된 배경에는 대체로 다음 세가지 요인들이 깔려 있다.
첫째는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공산정권의 전면붕괴로 상징되는 마르크시즘.
레닌이즘의 세계적 수준에서의 몰락이다.
이 역사적 대전환의 물결속에서 동독이라는 국가 자체가 소멸되고 서독에
흡수됨으로써 독일의 통일이 성취되자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붕괴 역시
임박했으며 대한민국에 의한 북한 흡수통일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둘째는 김일성의 사망이다.
지난 94년 7월의 김일성 사망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주요한 걸림돌이
마침내 제거됐다는 믿음을 널리 심어주게 됐다.
김일성의 사망은 또 북한의 붕괴를 알리는 징후로도 풀이됐다.
김일성의 계승자인 김정일의 건강이상설과 김정일 집안내부에서의 권력
투쟁설 등이 김정일의 공식적 권력승계 지연과 겹치면서, 게다가 식량위기로
요약되는 북한의 경제적 파탄이 노출되면서 북한이 결국 망할 것이라는
인상을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셋째는 20세기의 황혼이 짙어가면서 21세기의 여명이 나타나는 세기적
전환이다.
앞의 두가지 요인들에 이 세기적 전환이 겹쳐지면서 사람들은 21세기초가
되면 북한이 지도위에서 사라지고 통일된 국가가 한반도위에 서리라는
낙관적 발상을 갖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가지 요인들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통일 임박론이
확산됐다.
그래서 통일에 대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 과연 통일은 임박했는가.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이제 상식처럼 되어버린 통일임박론, 또는 만일
그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다면 통일가시권론으로 표현될수 있는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낙관적 통념에 대해 심각히 따져 보고자 한다.
필자가 판단하기로 한반도 통일의 외부적 여건은 지난 시대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
확실히 공산주의의 붕괴와 그리고 그것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냉전구조의
와해는 동북아시아에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 상징적인 보기로 우선 러시아와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대하는 새로운
자세에서 찾을수 있다.
80년대 말까지 북한만을 승인하고 대한민국을 부인했던 이 두나라가
오늘날에는 대한민국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의 우호협력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
그 상징적인 보기는 미국과 일본이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자세
에서도 찾게 된다.
북한의 존재를 외교적 형식에서 부인해 온 미국이 북한과의 핵협상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적지 않게 개선시켜 온 것이다.
일본의 속도는 늦지만 그래도 북한과의 수교협상을 포기하지 않은채
미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 개선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북한의 결심이 내려지기만 하면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
또는 공식관계 수립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이른바
한반도 주변 4강의 남북한 동시수교가 앞으로 2~3년안에 실현될 것이다.
확실히 국제적 냉전의 마지막 외로운 섬인 한반도 주변에도 봄은 찾아
오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의 내부적 환경은 뜻밖에도 개선의 방향보다는 악화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게 된 1차적인 책임의 소재지를 따진다면 아무래도 북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92년 2월에 발효한 "남북 기본합의서"를 사실상 파기시킨채
대화노선을 버리고 대결노선을 걸어 왔던 것이다.
93년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을 계기로 한 핵공갈외교, 북한의
식량난을 덜어주기 위해 쌀을 싣고 원산항에 도착한 남쪽 선박의 억류,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지난 9월에 저질러진 강원도 지역으로의 무장공비
침투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북한의 대결노선은 새삼 강조할 필요없이 세계적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다.
세계가 화해와 협조의 큰 물결을 확산시키고 있는 이때 북한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에 대해 적대적 행위를 거듭하는 것은 분명히
반민족적일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우리 대한민국에는 책임이 없는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
우리로서는 대결 노선을 피했고 대화노선을 추진해 왔으며 "남북 기본
합의서"에 입각해 평화통일의 길을 걷고자 노력해 왔음이 사실이다.
더구나 북한을 상대로 동포애를 발휘해 쌀을 보내 주고 여러가지 물품을
보내 줬다.
크게 보아 우리는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정부와 정당들의 언행에 자극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정부 스스로도 때때로 북한의 조기 붕괴를 공언하면서 흡수통일을
강조한 것은 슬기롭지 못했다고 하겠다.
이 대목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한번 중간 정리하기로 하자.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수 있다.
"한반도 통일의 한반도 외부적 환경은 크게 개선되고 있음에 반해 한반도
내부적 환경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명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한반도 통일에 진전이 보이지 않는 1차적 책임이
주변 열강에 있다기 보다는 남과 북의 한민족에게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지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반도의 분단구조는 2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국제정치적 성격과 내쟁적 성격이 그것이다.
국제적 권력정치에 희생이 되어 분단된 측면이 있는가 하면 민족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져 분단된 측면도 있고, 이 두 측면이 뒤얽히면서 분단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음이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이제 국제정치적 멍에는 꽤 많이 풀어지고
있음에 반해 내쟁적 멍에는 오히려 더욱 더 우리 한민족 전체의 목을 옥죄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다.
내쟁적 멍에를 우리 스스로 풀지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탓을 하겠는가.
다시 강조하거니와 필자는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돼 악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면
한반도에는 통일이 오기에 앞서 "확대된 내쟁"이 빚어내는 큰 규모의
유혈사태가 올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위험한 대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최근의 남북한 관계가 그것을 예고하지 않는가.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보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참으로 끔찍한 일이어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렵지만 옛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
연방에서 몇해동안 벌어진 내전을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지역의 상황은 소수민족들 사이의 갈등에 종교적 갈등이 얽혔기에
남북한 대결 상황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들이 냉전적 대결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으로 들어감
으로써 비강대국에 대한 냉전적 통제력을 잃게 되자 비강대국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내쟁에, 그리고 마침내 내전에 몰입하게 됐다는 사실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주는 교훈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9월에 저질러진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만해도 그렇다.
그것은 남북한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서는, 특히 주변 열강의 제동장치가
말을 듣지않는 경우에는 내전의 상황으로 악화될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때 국내의 몇몇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한반도 상황이 앞으로
독일형으로 가기보다는 유고슬라비아형으로 갈수도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
대비하는 시나리오도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이처럼 내쟁적 성격을 부추기고 있는가.
어째서 남과 북은 국제적 화해와 협력의 물결에 올라 타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싸우려고 하는가.
지금 이 질문은 남쪽에 대해서보다는 1차적으로 북쪽을 향해 던져지게
되는데, 간단히 묻건대 북한은 어째서 이다지도 싸움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대답은 별로 어렵지 않다.
남과 북 모두 "내주도 아래서의 통일, 내가 너를 흡수하는 방식 아래서의
통일"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과 반목의 불꽃이 거세게 튀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내가 너를 흡수하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 흡수당하고 만다"
는 절박감이 남북한 관계를 적대적 대결관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꼭 강조해야 할 점은 그 적대적 대결성에 있어 북쪽이
남쪽에 비해 훨씬 거세다는 사실이다.
남쪽은 "내가 너를 흡수하지 못해도 괜찮다.
네가 나를 흡수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굳이 흡수하려 하지
않겠다"는 선으로까지는 가 있다.
그것은 남쪽이 "통일을 일단 연기하더라도 전쟁은 회피해야 하겠고 너와
평화적으로 공존할 뜻이 있다"는 정책을 최소한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한의 의도는 전혀 다르다.
90년대 이후 북한은 체제 붕괴의 심각한 위기감에 젖어 있다.
국제정세의 변화는 북한을 국제적으로 크게 고립시켰다.
대한민국의 경제력 성장은 참으로 겁이 날 정도이다.
북한은 이렇게 가다가는 북한이 붕괴해 남쪽에 흡수되고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이 두려움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 마침내 국제적으로 널리 공인되게
된 북한의 식량위기이다.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 구조적 식량위기, 내년이면 더욱
악화될 이 만성적 식량위기는 결국 북한을 안으로부터 폭발시키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아무리 북한이 잘 통제된 사회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북한주민들이 굶주림에
익숙해 있다고 할지라도 이 혹심한 식량위기가 앞으로 2~3년 더 계속된다면
적지 않은 수의 서방 전문가들이 예측하듯 북한은 내부 폭발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
북한은 체제붕괴의 공포심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버렸다.
수십년동안 북한을 그 지독한 어려움속에서도 지탱시켜준 요소는
"주체의 나라"에 대한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국제적 거지"의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다.
자존심의 손상과 공포심의 증대는 사람을 비이성적이면서 폭력적으로
이끌게 된다.
북한이 최근 몇해 사이에 보여준 대결 지향적이면서 공격지향적인
대외행태의 뿌리에는 그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 점이 우리 대한민국이 깊이 고려해야 할 점이다.
쉽게 말해 독이 오를대로 올라서 막 갈수 있는 북한을 잘 다뤄야 한다.
강하게도 다뤄야 하고 유하게도 다뤄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만 다뤄서는 결코 슬기롭지 못하다.
이와 동시에 우리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대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잘못된 부분들은 과감히 고쳐야 하며 잘해온 부분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부추겨야 한다.
이점과 관련해 대한민국은 통일문제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북한이 동독이 아니듯 대한민국은 서독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지난날의 서독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잘사는 선진
민주복지국가로 발전시키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북한이 마음속으로 대한민국을 부러워하게끔, 대한민국으로의
자발적인 합류를 바라게끔 유도해야 한다.
통일보다도 평화가 확고히 뿌리내리는 쪽으로 힘을 써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구조가 성립되게 하면 남과 북사이에 통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아 올 것이다.
통일을 준비하려거든 평화를 먼저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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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피츠버그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12대 국회의원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겸 대변인
<>저서 : ''한국문제와 국제정치''
''러시아 혁명사''
''북한 50년사'' 등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