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이웃처럼 가까워졌지만 국내 관광업체중 아일랜드를 유럽일주
코스에 포함시킨 경우는 아직 없다.
수도 더블린에 지사를 설립한 종합상사도 전무하다.
유럽에서조차 더블린행 항공편은 흔치않아 서울에서 입국하자면
런던이나 취리히 등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의미에서 아일랜드는 이른바 ''서유럽의 변방국''이라 할 만하다.
이런 유럽의 오지, 아일랜드에 현지공장을 지어 놀랍게도 연간
1억달러이상의 제3국 수출을 달성하는 기업이 있다.
새한미디어의 SMIL(Saehan Media Ireland Ltd )이 그것이다.
새한미디어가 100% 출자한 SMIL 은 아일랜드에서도 서북쪽 끝인
슬라이고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공장을 찾아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다.
수도 더블린에서 슬라이고시까지 아일랜드 국적기가 하루 한차례 뜨지만
오후2시께 이비행기를 타자면 종일을 허비해야해 갈길바쁜 방문객은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양떼들이 뛰노는 목가적 농촌풍경, 유럽이면서도 문명에 다듬어지지않은
구불구불한 2차선 산길국도를 따라 4시간쯤 달리면 인구5만의 슬라이고
카운티에 이른다.
자동차만 없다면 여지없는 중세 소도시다.
교회건물을 제외하면 2층이상의 건물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도심의 가로도 좁다.
"하필이면 왜 이런 골짜기에 공장을 지었을까.
해외투자 열풍속에서도 새한미디어 말고는 아직 국내 어느기업도 눈길조차
주지않고있는 나라에..정말 잘 되기는 할까"
이런 의구심은 끝내 "잘못 찾아오지 않았을까"하는 걱정이 되고만다.
그러나 도심을 벗어나 몇분을 달린뒤 공장입구에 들어서면 예감은
조금씩 빗나간다.
우아한 고성 옆에 지어진 일자형 긴 공장형태.
철없는 방문객은 모처럼 보는 현대식 건물에 다소 안도한다.
이어 안태준사장(49)의 안내로 공장내부를 둘러보며 그 안도는 마침내
뿌듯함으로 바뀌었다.
현대식 설비앞에서 바쁜 일손을 놀리는 노랑머리 처녀들의 모습이 무척
진지하다.
먼지없는 작업환경을 위해 생산라인 근로자들은 한결같이 방진복을
입고 있다.
최종라인에서는 소니 코닥등 세계 정상의 브랜드로 포장된 비디오
테이프들이 작업완료 즉시 수출선적을 위해 어디론가 실려나간다.
"왜 이런 생소하고 엉뚱한데 투자할 생각을 하셨지요"
정말 이해가 안된다는 투로 묻는 질문에 안사장은 다음 세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은 유럽의 관세장벽을 피하기 위해서다.
비록 EU의 보조금을 받는 형편이지만 아일랜드도 엄연히 유럽공동체의
일원이다.
상대적으로 임금도 싸다.
둘째는 이곳의 높은 공기 청정도가 감안됐다.
비디오테이프 생산에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에어퀄리티.
이곳은 문명에 의한 자연훼손이 거의 안된 오지인데다 일년중 8개월이상
비가 내린다.
먼지도 공해도 없는 최상의 에어퀄리티 지역인 셈이다.
셋째는 고립된 지역인만큼 노사안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공업화지역은 인근공장의 영향으로 근로분위기가 쉽게 흐트러질수 있다.
그러나 이곳 골짜기는 그런 걱정이 필요없다.
안사장은 여기다 하나 더 덧붙인다.
선대 이창희회장의 투지와 선견지명이 그것이다.
새한을 세계 제1의 비디오업체로 키우겠다는 고 이회장의 의지가
유럽투자를 결심케 했고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묻혀있는 진주, 슬라이고를
발견해냈다는 설명이다.
물론 새한의 슬라이고 공장경영도 처음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출범초기에는 노조가 말썽을 부렸다.
동양계 경영주에 대해 유럽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듯도 했다.
그러나 한국본사로 기술연수를 다녀온 사원들을 중심으로 한국과 새한의
저력이 확인되자 갈등은 곧 해소됐다.
생산제품의 초기 판로개척도 쉽지는 않았다.
유럽내 바이어들은 우선 한국기업이 유럽의 변방인 아일랜드에서 생산한
제품을 믿으려 하지않았다.
그것도 슬라이고라는 오지에서.
SMIL 측은 이문제를 바이어들을 초청, 공장을 보여줌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후일담이지만 대부분 바이어들은 처음엔 초청을 받고도 전혀 제품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슬라이고에 도착해 승용차로 도심을 빠져나올때까지만 해도 "역시
시골뜨기들이구나"하고 생각했었다니까요.
그러나 공장입구를 들어서며 "제법이다"는 느낌을 받았고 생산라인을
둘러본뒤엔 완전히 놀라서 새한의 팬이 되었다고들 해요"
안사장의 설명은 쉽게 이해됐다.
기실 우리도 똑같은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초기의 역경을 하나하나 이겨나가자 그 보람은 곧 SMIL 의 경영성과로
나타났다.
모두 2,250만달러를 투자, 92년9월 최종준공된 SMIL 공장은 94년
67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해에는 또 ISO 9002 인증을 획득, 품질면에서도 세계 정상에 손색이
없음을 널리 인정받았다.
이어 지난해에는 매출 1억달러를 넘겨 전유럽내에서 독일 바스프에
이어 제2의 비디오테이프 생산업체로 부상했다.
이같은 성장세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SMIL의 활력은 슬라이고시 경제 활성화에도 결정적 기여를 하고있다.
오지의 잠자던 도시가 깨어나면서 우선 자동차가 급격히 늘어났다.
휴가철 한때 비정기적으로 운항되던 항공기가 비록 하루 한차례지만
정기노선으로 바뀌었다.
시내의 상점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중국식당도 SMIL이 가동되면서
돌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자연 슬라이고시측의 SMIL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시 공무원들은 수시로 도와줄것이 없느냐고 물어보고 문제점에 대해서는
즉각 조치를 취한다.
SMIL은 그러나 지금까지의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는다.
소니 코닥 TDK 등 기존의 메이저 업체들이 제조분야에서 손을 뗄
움직임인 만큼 단기적으로는 그 공백을 메운다는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MD DVD MOD 등과 관련된 차세대제품을 한국의 기술진들과
협력해 생산해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있다.
새한미디어는 이제 아일랜드의 SMIL을 세계의 SMIL로 키운다는 꿈을
펼쳐가고 있는 것이다.
<김기웅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