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정치적 주체는 선비들의 집단인 사림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끌어간 정치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언론의
역할을 담당했던 대간중심의 "의론정치"라고 할 수 있다.

절대군주인 국왕이 있었다고 해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란
원칙적으로는 없었다.

당시 "도목정사"라고 불렀던 관리임용제도와 인사행정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인사는 관료의 근무연수와 근무평정에 따라 매년 6월과 12월 두차례
실시했다.

이때 관리의 명부(사판)나 근무성적표(도역장)를 토대로 이조와 병조의
전형위원들이 모여 관직마다 적격자 3명을 선발한뒤(삼망) 일람표로
만들어 올리면 왕이 최종적으로 한명을 낙점하고 이를 관보인 "조보"에
공표한다.

이렇게 결정된 사람은 본인의 아버지 어머니 처의 부모 조 증조 외조의
명부를 사헌부와 사간원에 보내 결격사유의 유무를 판정받는 "서경"이라는
신원조회를 거친 뒤에야 직첩이 발급된다.

과거급제자는 "서경"은 면제받았다.

도합 다섯번의 시험을 보는 동안 이미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편 천거되는 사람은 더 심하게 신원조회를 했다.

한 국가의 정치적 성쇠는 현명한 인물을 쓰느냐, 용열한 인물을
쓰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조선 왕조에서는 이처럼 인재
등용이나 관리에 왕조차 전횡할 수 없도록 하는 견제장치를 해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림과 대치상황에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대표적 왕이 성종과 영조였다.

훈구세력과 신진사류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성종은 경상도 사임의
종장 김종직을 도승지로 임명했다.

그의 제자들이 과거에 급제한뒤 속속 대궐로 들어와 발탁인사로
요직을 맡게 되자 조정은 젊은 선비들이 장악하는 형세가 됐다.

훈구파 쪽에서"경상도 도당"이란 묘한 말로 이들을 비난했다.

성종의 개혁의지도 훈구파 권신들의 거센 반대로 한때 무산되는듯
보였다.

그러나 영명한 왕이었던 성종은 훈구파 권신들과 신진사류를 설득해가며
그 속에서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개혁의지와 권위를 조금씩
되찾아 나갔다.

성종조를 태평성대였다고 부르는 것은 이런 그의 비상한 정치적
지도력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한편 성종과는 반대로 당파가 생긴지 200여년이나 지나 당쟁이 극성을
부릴때 즉위한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우며 왕권을 강화하려 들었다.

국가의 공기인 관작을 자기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그는 자기정책의
편의에 따라 조정 신하들을 관작으로 얽어맸다.

그의 인재 등용은 마음대로였다.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을 8일만에 바꾸고 사간원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사성을 각각 3일만에 갈아치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부귀만 탐내는 아첨배들만 조정에 득실거리는 꼴이 되어
영조는 탕평은 고사하고 노론쪽에 말려들고 만다.

붕당의 극한 대립이 때로는 정도가 지나쳐 정국을 경색시키기도 했으나
사림정치 학태는 최근 기본적으로 왕의 전횡을 막고 비판세력의 공존을
전제로한 이상적인 것이라는 학계의 평가도 나왔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이양호 전국방부장관 비리의혹 사건"때문에 발칵
뒤집혀 있다.

그가 어떤 방법으로 인사청탁을 했는지, 어떻게 뇌물을 받았는지는
수사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국방관련 고급기밀을 무기중개상인에게
알려줄 정도의 인물이 어떻게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자리까지
오를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참담해진다.

무기중개상에게 수년간이나 위협을 받고 군기밀까지 알려준 인물에게
무장공비 토벌책임까지 맡겼었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 지기도
한다.

세종때 김흔지라는 인물은 왕족에게 사람크기(등신)와 같은 금불을
만들어다 바치고 승지가 됐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등신승지"라고
놀려댔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실려 있다.

그가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반지를 주고 인사청탁을 했다면 "다이아몬드
장관"쯤으로 부르면 그만이 아닌가.

더 큰 문제는 대상인물에 대한 철저한 검증없이 대통령이 장관에
임명했다가 허겁지겁 다른 사람으로 임명한 사례가 몇번 있었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났다는데 있다.

또 자신의 과오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라고 홀로 믿고 무조건 높은
자리면 로비를 해서라도 파리처럼 달려드는 무리들도 문제다.

옛 선비들은 이런 인물들을 난초속에 섞인 도꼬마리라고 천시했다.

병조판서를 지냈던 율곡 이이는 병권을 맡으라는 어명에 "모기가
태산을 짊어진 꼴이고 등짐질 자가 수레탄 격"이라고 극구 사양하다
할 수 없이 취임해 짧은 재임기간 동안 개혁적인 명병조판서로 이름을
떨쳤다.

근래에 임명된 고위관리들 가운데 율곡처럼 능력이 모자란다고 사양한
사람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다.

아마 세태가 그런가 보다.

"사람을 쓸때는 눈앞의 친소로 스스로 인재를 식별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해서는 안된다.

여러 사람을 찾아가 자문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른 재덕을 변별하고 그 그릇에 따라 직책을 맡겨
적절히 헤아려 써야만 한 나라의 사무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말의 기철학자 최한기가 "인정"에 기록한 한 구절을 되새겨
보게 되는 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의 우리 인사정책이 옛날보다
더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사람을 천거했을때 "만일 추천된
자가 뇌물죄나 인륜에 어긋나는 죄를 범하면 천거한 장본인도 함께
그 죄에 연좌된다"는 조문이 있다.

천거한 자의 책임도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