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개헌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 5년단임제의 현행헌법은 문제가 많다"

"대통령중심제는 폐단이 너무 많다.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바꿔야 한다"

총선이후 부쩍 늘어난 개헌논의가 개인적인 견해라는 형식으로
국회의장 여당대표는 물론 야당쪽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그들 발언의 골자는 대개 표현상의 차이는 있지만 현행 헌법으로는
책임있는 정치를 펼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도 아니고 입법부의 수장과 집권당의 대표가 개헌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그만큼 현행 헌법이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의도와 배경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여-야 중진들의 입에서
개헌의 필요성이 제기됐다면 개헌의 필요성을 느끼는 정치인들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언젠가는 개헌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헌정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집권당의 실세들은 내년 대선 전까지 개헌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개헌을 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시간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쯤은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87년의 개헌은 6.29선언이 있은지 불과 4개월만에 이루어졌었다.

시간은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늘 그래왔듯이 개헌은 정치적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9차례의 보수공사를 경험한 우리의 헌정사는 이같은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집권당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내각제와 대통령제를 왔다 갔다 하던
우리 헌법은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개정까지도 경험했다.

국민의 염원을 조금이나마 반영한 헌법개정은 지난 87년에 이루어졌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아야겠다는 국민적 염원이 집약돼
체육관 선거를 치르지 않도록 규정했다.

이 헌법은 어떻게 해서든지 대통령의 독선과 독재를 막아야겠다는
국민 의지를 반영, 집권당의 국회 의석수가 과반수를 넘지 못하면
총리임명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게 해놨다.

대통령의 임기도 7년단임에서 5년단임으로 단축했다.

장기집권과 독재에 식상한 국민의 염원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건국이래 처음으로 진정한 민선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기틀을 잡은
것으로 평가받았던 현행 헌법에 의해 두번째로 뽑힌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이다.

임기가 아직 1년여 남은 시점에서 대통령임기를 두고 이러 저러한
논의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국민의 뜻이라기 보다는 정치권의 이해가 걸려 있다.

집권당의 재집권 가능성, 적당한 후보의 존재여부 등등이 개헌논의의
변수다.

대통령줌심제가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한 집권당에서는
대통령의 임기와 중임제가 주로 거론되고 집권가능성이 희박한 한
야당에서 내각제가 거론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개헌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개헌을 바라는 정치인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개헌을 공개적으로 거론해보자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대통령은 단임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임기말까지
그것을 지켰다.

현실적인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끝까지 약속을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는 우직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명한
정치인은 되지 못한다.

정치란 흔히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고 한다.

그 말은 끊임없이 달라지는 대중의 욕구를 적절히 수용해 현실에
반영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통령 임기가 4년이든 5년이든, 또는 중임이든 단임이든 사실
대중에게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있다.

그들은 물가가 너무 많이 오르지 않기를 바라고, 치안이 잘 확립돼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정치인은 이런 사회를 만들어낼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권력구조가 목적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바꿔야 마땅하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개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책임있는 정치인이 해서는 안될 일이다.

개헌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능하고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이같은 거부감을 극복하고
책임질 수 있는 권력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과정만 투명하고 합리적이라면 개헌을 반대할 국민이 과연 있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5일자).